항목 ID | GC043009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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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豪族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권만용 |
[정의]
통일 신라 말기에서 고려 초기까지 경기도 양주 지역에 존재한 지방 세력.
[개설]
호족(豪族)은 통일 신라 말기의 혼란스런 정국 속에서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지방에서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여 지방 사회에서 지역에 대한 일정한 행정적·경제적·군사적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던 독자적인 지방 세력으로 사회 변동을 주도한 지배 세력이었다.
[성격]
호족은 대체로 낙향한 귀족 세력, 지방의 군진 세력, 해상 세력, 지방의 토착 세력인 촌주(村主) 출신의 호족이 있는데, 이들은 스스로 장군(將軍)이나 성주(城主)를 자처하면서 지방 사회를 통치하였다. 또한 그들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사병을 중심으로 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중앙과 비슷한 관부(官府)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낙향 귀족 출신의 호족은 주로 5소경과 9주의 치소(治所)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존재하였다. 군진 세력 출신과 해상 세력 출신의 호족은 주로 패서(浿西)[서경을 중심으로 한 14주 4현] 지역이나 근기(近畿) 지역, 서해안·남해안 지역 등 변경 지역에 존재하였다. 촌주 출신의 호족은 군현 정도의 지역이나 그보다 작은 지역에 존재하였다.
[역할]
호족은 통일 신라 말기 사회 변동을 주도하였고, 경주 중심과 진골 중심의 신라 골품제 사회를 해체하고 각지의 지방민과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이 지배 체제에 참여할 수 있는 보다 개방적인 사회 체제를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고, 고려 왕조 성립에 새로운 세력으로서 큰 역할을 하였다. 고려 건국 후 호족들은 중앙으로 진출해 문벌 귀족이 되었고, 지방에 남아 향리가 되기도 하였다.
[양주 지역의 호족]
양주의 호족에 대한 자료는 『고려사(高麗史)』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갑인(甲寅)에 매조성(買曹城) 장군 능현(能玄)이 사자를 보내어 항복하기를 청하였다.”[『고려사』 권1, 태조 8년 9월]는 내용인데, 매조성은 매초성(買肖城)이므로 양주 지역으로 여겨지며, 이곳 호족인 능현이 925년 고려에 귀부한 것을 알 수 있다. 923년 3월에도 지금의 포천 지역 호족인 명지성(命旨城) 장군 성달(城達)이 고려에 귀부하는 등 양주 북부 지역이 고려의 영향권 내에 들어가자 더 이상의 자립 유지가 어렵다고 판단한 능현도 귀부한 것으로 짐작된다.
935년 6월 양주는 후백제왕 견훤의 식읍(食邑)이 된다. 이 사실은 “견훤을 일컬어 상보(尙父)라 하고 남궁(南宮)을 관사(館舍)로 주고 위(位)를 백관(百官)의 위에 차지하게 하였으며, 양주를 내려주어 식읍을 삼게 하였다. 겸하여 금백(金帛)과 노비 각 40명과 말 10필을 내려 주었으며, 앞서 항복해 온 신강(信康)으로 하여금 아관(衙官)을 삼았다.”는『고려사』 권2 태조 18년 6월조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