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8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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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希儉 |
이칭/별칭 | 경질(景質),동고(東皐),국재(菊齋)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정덕 |
출생 시기/일시 | 1516년 - 이희검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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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546년 - 증광문과 병과 급제, 성균관 학유 |
활동 시기/일시 | 1560년 - 필선, 사간, 동부승지, 우승지, 오위 장 |
활동 시기/일시 | 1563년 - 우승지 |
활동 시기/일시 | 1569년 - 황해도 관찰사 |
활동 시기/일시 | 1573년 - 도승지 |
활동 시기/일시 | 1574년 - 예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도총부 부총관, 사헌부 대사헌 |
활동 시기/일시 | 1576년 - 자헌대부 지돈녕부사, 공조 판서 |
활동 시기/일시 | 1577년 - 형조 판서 |
활동 시기/일시 | 1578년 - 병조 판서, 형조 판서, 지경연사 |
몰년 시기/일시 | 1579년 - 이희검 사망 |
묘소|단소 | 이희검 묘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산90-1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전주 |
대표 관직 | 병조판서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묘소가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질(景質), 호는 동고(東皐) 또는 국재(菊齋). 증조할아버지는 모양군(牟陽君) 이직(李稙)이고, 할아버지는 선사정(仙槎正) 이승손(李承孫)이며, 아버지는 하동령(河東令) 이유(李𥙿)이다. 어머니는 유곤원(柳坤元)의 딸이다. 신당령(神堂令) 이정(李禎)에게 입양되었다. 동생으로 대사간을 역임한 이희득(李希得)이 있고, 아들은 『지봉유설(芝峯類說)』을 지은 이수광(李睟光)이다.
[활동 사항]
이희검(李希儉)[1516~1579]은 1546년(명종 1)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에 임명된 후 박사, 전적, 예조좌랑과 병조좌랑 경상 도사, 예조 정랑, 사헌부 지평을 거쳤다. 사간원과 사헌부 장령을 여덟 번, 헌납·사간·집의를 한 번씩 하였으며 옥당(玉堂)[홍문관]에 들어가 부교리 및 교리를 거쳐 사예와 사성, 선공감, 제용감, 사섬시 정(司贍寺正), 사도시 정(司䆃寺正)을 역임하였다. 1560년(명종 15) 필선(弼善)으로 두 번 사간(司諫)에 임명되었고, 동부승지, 우승지, 오위 장를 지냈다.
좌사간으로 있으면서 임금의 인척인 이량(李樑)의 횡포를 간하였다가 장단 부사로 좌천되었다. 1563년(명종 18) 이량이 유배된 후 우승지로 복직하였다. 가을에 아버지 하동군(河東君)이 사망하여 상을 치른 뒤 예조 참의, 좌우승지, 참의를 지냈다. 1569년(선조 2)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가을에 생모 하동군 부인(河東君夫人)이 죽고, 이듬해 어머니 신당군 부인(神堂君夫人) 강씨도 죽었다. 연이어 상을 당한 이희검은 단이 뜯어진 옷을 입고 1년 가까이 여막살이를 하며 정성껏 묘를 지켰다.
상을 마치고 예조에 들어가 존호사로서 명나라를 다녀왔다. 사신으로 갔다 올 때는 귀한 물건을 많이 사 오는 것이 관례였지만 이희검은 책조차 사지 않아 짐수레가 차지 않았고, 따르는 사람도 충복 몇 명뿐으로 단출하였다. 1573년(선조 6) 판결사로서 도승지를 지낼 때 아픈 인성왕후(仁聖王后)[인종의 비]에게 약을 지어 주어 병이 낫게 하였다. 그 공으로 가선대부 품계가 더해졌다.
1574(선조 7) 예조 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도총부 부총관, 사헌부 대사헌에 이어 예조로 옮겼다. 1575년(선조 8) 인순왕후(仁順王后)[명종의 비]가 승하하자 수릉관(守陵官)이 되어 부모의 상을 당한 것처럼 정성껏 예를 치렀다. 3년이 다 되도록 집에 연락을 하지 않으니 가족들이 큰일을 하고 있으려니 여겼다고 한다. 그해 가을 임금이 능에 행차하여 가의대부로 품계를 올려 주었다. 1576년(선조 9) 자헌대부 지돈녕부사, 겨울에 공조 판서가 되었다. 1577년(선조 10) 왕후의 제사를 마친 후 형조판서가 되었고, 1578년(선조 11) 병조판서, 형조판서, 지경연사로 벼슬이 올라갔다. 1579년(선조 12) 64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희검은 공과 사가 분명하고 지나칠 정도로 청렴하였는데, 그의 청렴은 소위 비우 사상(庇雨思想)이라고 일컬어지는 철학에 바탕한 것이다. 비우 사상이란, 이희검의 외증조할아버지인 정승 유관(柳寬)이 장마철에 비가 새는 방에서 우산을 받고 앉아 우산 없는 사람들을 걱정하였다는 우산각(雨傘閣)의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청렴의 가풍은 이희검에게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는 이 초가집을 약간 넓혀서 살았는데, 손님들이 집이 소박하다고 말하면 “우산에 비하면 너무 사치스럽다.”고 답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비우 사상은 그의 아들인 이수광에 이르러 청빈 사상으로 성숙되었다. 이수광은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우산각을 다시 지어 ‘비우당(庇雨堂)’이라 이름하고, 이곳에서 『지봉유설』을 집필하였다.
[학문과 저술]
저서로 『동고집(東皐集)』이 있다.
[묘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 산90-1번지에 무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