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6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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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田九畹 |
영어음역 | Jeon Guwon |
이칭/별칭 | 정칙(正則),우와(愚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인표 |
[정의]
조선 중기 경상북도 울진 출신의 문장가.
[가계]
본관은 담양(潭陽). 자는 정칙(正則), 호는 우와(愚窩). 아버지는 취죽헌(翠竹軒) 전유추(田有秋)이고, 어머니는 울진장씨로 장여길(張汝吉)의 딸이다. 부인은 신안주씨로 주개신(朱介臣)의 딸이다. 형의 아들 전덕철(田德哲)을 후사로 삼았으나 일찍 죽었다.
[활동사항]
아홉 살 때 중양절 모임에서 지은 「중양(重陽)」이라는 시에서 “나그네는 청천월에 취하고, 단풍은 구월산에 붉었네(客醉靑天月 楓丹九月山)”라고 하여 그 자리에 모인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형 전구주(田九疇)와 동생 전구령(田九齡)과 더불어 만휴(萬休) 임유후(任有後)[1601~1673]에게서 배웠는데, 학문과 덕행이 뛰어나 울진군의 사람들이 죽림(竹林)의 삼봉(三鳳)이라 칭찬하였다.
1636년(인조 14) 남한산성의 굴욕 소식을 전해 듣고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도동해시(蹈東海詩)」를 지어 병자호란(丙子胡亂)에 대한 분개와 울분의 뜻을 표현하였다. 1640년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1595~1646]이 관찰사로 울진군에 왔을 때 전구원에게 육언절구로 된 시 한 편을 내리자 전구원이 이에 화답하여 “도원 골짜기는 구름이 가득한데 율리의 삼춘은 수석에 취했구나(桃源一洞雲關 栗里三春醉石)” 하니 이명한이 시법이 백설과 같다 하고 돌아가 소금 한 섬을 보냈다.
1642년 진사시에 급제하였으며, 1650년 이후 정자를 지어 ‘구장(龜藏)’이라는 현판을 달고 ‘군자정(君子亭)’이라 이름 지었다. 3형제가 매일 그곳에 올라, 우암(憂菴) 윤시형(尹時衡), 만은(晩隱) 전선(田銑), 한재(寒齋) 주필대(朱必大) 등과 어울렸다. 서파(西坡) 오도일(吳道一)이 울진군수로 부임하여 전구원을 훈장으로 삼고, 향사음례(鄕射飮禮)를 행하여 유풍(儒風)을 크게 진작시켰다.
오도일이 서장관(書狀官)으로 발탁되어 내직으로 옮기면서 전구원의 시와 문장을 모아 서울의 선비들에게 두루 보이니 혹자는 “심오한 시법이 광채를 발한다” 하였고, 혹자는 “큰 옥을 갈라 둔 것 같다” 하였으며, 혹자는 “장안의 종이 값이 하루아침에 뛰어오를 것이라” 하였고, 혹자는 “백수문장(白首文章)이란 소문이 장안에 가득하니 우와(愚窩)의 ‘우(愚)’자는 오늘부터 ‘우(愚)’가 아니네”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서울의 학자들이 그의 풍모를 사모하여 관동의 사표(師表)라 일컬었다. 1691년 향년 7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우와집(愚窩集)』 3권 2책이 있고, 예서 『태고헌향음주서(太古軒鄕飮酒書)』가 전한다.
[상훈과 추모]
1863년 만은 전선과 함께 구장사(龜藏祠)에 배향되었다. 1868년 서원이 철폐되면서 그 자리에 유허비각을 지어 봄가을로 제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