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3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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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月松里碑石群 |
영어의미역 | Monument Stones in Wolsong-r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52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인표 |
성격 | 비석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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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월두형|귀접이형 |
건립시기/일시 | 1851년 5월[이계선 선정비]|1837년 11월[한익상 휼민선정비]|1830년[이치원 영세불망비]|1788년 10월[김이빈 휼해영세불망비]|1787년[정은성 애민선정비]|1842년 5월[이옥 영세불망비] |
관련인물 | 이계선|한익상|이치원|김이빈|정은성|이옥 |
재질 | 화강암 |
높이 | 이계선 선정비 120㎝|한익상 휼민선정비 133㎝|이치원 영세불망비 121㎝|김이빈 휼해영세불망비 110㎝|정은성 애민선정비 78㎝|이옥 영세불망비 78㎝ |
너비 | 이계선 선정비 38㎝|한익상 휼민선정비 43㎝|이치원 영세불망비 42㎝|김이빈 휼해영세불망비 49㎝|정은성 애민선정비 41㎝|이옥 영세불망비 38㎝ |
소재지 주소 |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521 |
소유자 | 미상 |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읍 월송리에 있었던 조선 후기 비석군.
[건립경위]
비석은 모두 6기로 선정비(善政碑)가 3기이고, 불망비(不忘碑)가 3기이다. 조선 후기에 평해군수를 역임하면서 이 지역의 주민을 위해 업적을 남긴 관리들을 기리고자 평해군 주민과 유림, 향리들이 뜻을 모아 건립하였다.
[위치]
비석은 월송리에 있었으나 2010년 이전하여 현재는 봉평리 봉평 신라비 전시관 비석거리에 배열되어 있다.
[형태]
화강암과 역암으로 제작되었으며, 3기는 갓모양의 지붕[가첨]이 비신에 붙어 있고, 2기는 월두형 비석이며, 1기는 귀접이형 비석이다. 북쪽의 비석부터 차례로 보면 다음과 같다.
1. 어사또 이계선 선정비(御史道 李啓善 善政碑)
화강암으로 제작된 갓모양의 지붕이 비신과 붙어 있는 형태로 비좌는 없고, 남쪽으로 기울어져 다른 비석에 기대어 있다. 지붕은 너비 45㎝, 높이 40㎝, 두께 14.5㎝이고, 비신은 높이 80㎝, 너비 38㎝로 전체 높이는 120㎝이다.
비신의 앞면에 글자 크기 8×8㎝로 ‘어사도이공계선선정비(御史道李公啓善善政碑)’를 새겼다. 옆면에는 글자 크기 4×4㎝로 ‘함풍원년오월일(咸豊元年五月日)’이라는 비석의 건립 연대를 새겼다. 비석을 건립한 때는 1851년 5월이다. 『철종실록』 철종 2년조(1851)에 있는 이계선(李啓善)이 암행어사로서 강원도 지역을 돌아 보고난 뒤 왕을 만난 자리에서 평해군수였던 서경보와 울진현감이었던 성영귀 등을 벌할 것을 건의하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2. 관찰사 한익상 휼민선정비(觀察使 韓益相 恤民善政碑)
화강암으로 제작된 갓 모양의 지붕이 비신과 붙어 있는 형태로 비좌는 없다. 지붕은 너비 53㎝, 높이 43㎝, 두께 18㎝이고, 비신은 높이 90㎝, 너비 43㎝, 두께 18㎝로 전체 높이는 133㎝이다. 비신의 앞면에 글자 크기 8×7㎝로 ‘관찰사한공익상휼민선정비(觀察使韓公益相恤民善政碑)’를 새겼다. 옆면에는 글자 크기 4×4㎝로 ‘도광정유십일월일(道光丁酉十一月日)’이라는 비석의 건립 연대를 새겼다. 비석의 건립 연대는 1837년 11월이다.
한익상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호는 자오(自娛) 또는 백졸(百拙)이다. 1836년(헌종 2) 전국에 기근이 심하고 탐관오리들이 횡행할 때 강원도관찰사로 임명되어 선정을 베풀었다고 한다.
3. 찰방 이치원 영세불망비(察訪 李致元 永世不忘碑)
역암으로 제작된 갓 모양의 지붕이 비신과 붙어 있는 형태로 비좌는 없다. 구름무늬 장식이 있는 지붕은 너비 49㎝, 높이 38㎝, 두께 14㎝이고, 비신은 높이 83㎝, 너비 42㎝, 두께 14㎝로 전체 높이는 121㎝이다.
뒷부분 오른쪽이 파손된 비신의 앞면에는 글자 크기 6×6㎝로 ‘찰방이공치원영세불망비(察訪李公致元永世不忘碑)’를 새겼는데, ‘비(碑)’자는 땅에 매몰되었다. 좌우로 비명(碑銘)이 있으나, 마모되어 판독하기 어렵다. 옆면에는 글자 크기 4×4㎝로 ‘도광정유십일월일(道光丁酉十一月日)’이라는 비석의 건립 연대를 새겼다. 비석의 건립 연대는 1830년이다.
4. 군수 김이빈 휼해영세불망비(郡守 金履彬 恤海永世不忘碑)
화강암으로 제작된 월두형 비석으로 비좌는 없다. 비신은 앞면과 뒷면 아래쪽이 절단되어 시멘트로 보수한 흔적이 있으며, 규모는 높이 110㎝, 너비 49㎝, 두께 5㎝이다. 비신의 앞면에 글자 크기 7×8㎝로 ‘군수김공이빈휼해영세불망비(郡守金公履彬恤海永世不忘碑)’를 새겼는데, ‘망(忘)’자는 비신이 파손되어 읽을 수 없다. 뒷면에는 글자 크기 5×7㎝로 ‘건륭오십삼년술신시월일(乾隆五十三年戌申十月日)’이라는 비석의 건립 연대를 새겼다. 비석의 건립 연대는 1788년 10월이다. 김이빈은 1787년 1월 평해군수로 부임하여 1788년 6월 울산우후(蔚山虞侯)로 이임하였다.
5. 군수 정은성 애민선정비(郡守 鄭殷誠 愛民善政碑)
화강암으로 제작된 월두형 비석으로 비좌는 없다. 비신은 높이 78㎝, 너비 41㎝, 두께 12㎝이다. 비신의 앞면에 글자 크기 7×6㎝로 ‘군수정공은성애민선정비(郡守鄭公殷誠愛民善政碑)’라 새겼는데, ‘비(碑)’자는 매몰되었다. 뒷면에는 글자 크기 5×5㎝로 ‘건륭오십이년정미정월 일 거원(乾隆五十二年丁未正月 日 巨遠)’이라는 비석의 건립 연대를 새겼다. 비석의 건립 연대는 1787년 정월이다. 정은성은 무과를 급제한 후 1786년 정월 평해군수로 부임하여 1787년 정월 강진우후로 이임하였다.
6. 군수 이옥 영세불망비(郡守 李鈺 永世不忘碑)
화강암으로 제작된 귀접이형 비석으로 비좌는 없다. 비신은 오른쪽 아래부분이 파손되어 시멘트로 보수했으며, 규모는 높이 78㎝, 너비 38㎝, 두께 9㎝이다. 비신의 앞면에 글자 크기 7×6㎝로 ‘군수이공옥영세불망비(郡守李公鈺永世不忘碑)’를 새겼는데, ‘비(碑)’자는 매몰되었다. 뒷면에는 글자 크기 6×5㎝로 ‘도광이십이년임인오월 일(道光二十二年壬寅五月 日)’이라는 비석의 건립 연대와 비명을 새겼다. 비석의 건립 연대는 1842년 5월이며, 비명은 마모가 심하여 읽기 어렵다. 이옥은 문과에 급제한 후 1840년 1월 22일 평해군수로 부임하여 1842년 6월 울산우후로 이임하였다.
[금석문]
지방관의 선정과 구휼 등을 찬양하는 4언 4구의 비명(碑銘)이 있는 경우가 있으나, 비문의 마멸로 읽기 쉽지 않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어사또 이계선 선정비: 奕革十七 惠辰四百 海濶天長 竝壽者石
2. 관찰사 한익상 휼민선정비: 化宣令名 歌登古蜀 澄淸其手 沈准不足
3. 찰방 이치원 영세불망비: 損廩□□ □煩□□ 恩布百里 □□□利
4. 군수 이옥 영세불망비: 瘠□肥民 □□□□ 恩與海深 □□□□
[현황]
비석들은 보호용 자동차 타이어를 매어 놓은 것이 일부 있을 정도로 관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방치된 채 있었으나 2010년 봉평 신라비 전시관으로 이전되어 현재는 잘 관리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월송리 비석군은 조선 후기에 평해군수로 재임하면서 좋은 정사를 베풀어 울진군 평해 지역 주민들의 존경을 받던 관리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주민들의 뜻을 모았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