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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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權震應 |
이칭/별칭 | 산수헌(山水軒),형숙(亨叔)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재형 |
출생 시기/일시 | 1711년 - 권진응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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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771년 - 권진응 제주도로 유배됨 |
활동 시기/일시 | 1772년 - 권진응 특별 사면 |
몰년 시기/일시 | 1775년 - 권진응 사망 |
유배|이배지 | 권진응 유배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안덕면 창천리 |
성격 | 문신|유배인 |
성별 | 남 |
본관 | 안동 |
대표 관직 | 자의 |
[정의]
조선 후기 제주도 대정현 창천리에 유배된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 자는 형숙(亨叔), 호는 산수헌(山水軒). 아버지는 제주 목사를 역임한 권정성(權定性)이고 증조부는 권상하(權尙夏)이다.
[활동 사항]
권진응(權震應)[1711~1775]은 어려서부터 징사(徵士) 한원진(韓元震)의 문하에서 수학, 독서를 많이 했으나 과거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를 치르지 않고 의정 대신과 이조 당상이 모여서 경연관이나 특정 벼슬의 적임자를 뽑던 초선(抄選)에 뽑혀 시강원의 정7품 자의(諮議)가 되었다. 나중에 증조부 권상하의 일로 『유곤록(裕昆錄)』에 대해 상소로 논한 것이 문제가 되면서 1771년(영조 47) 대정현 창천리[지금의 서귀포시 안덕면]에 유배되었다.
유배소는 창천리의 강필발(姜弼發)의 집인데 그 곳에 살면서 자신의 호를 ‘산수헌’이라 하고 그 집을 창주정사(滄州精舍)라고 일컬었으니 이는 주자(朱子)의 ‘오도부창주지의야(吾道付滄洲之義也)’에서 따온 것으로, 주자가 자신의 학문이 위학(僞學)이라고 심한 공격을 받았으나 후학을 가르치며 저술을 쉬지 않았던 것을 자신의 처지에 비유하였던 것이다.
창주정사 근처에는 낭떠러지 언덕에 큰 바위가 있어 자주 그곳에 올랐는데 그곳에 오르면 안계(眼界)가 확 트여 용연(龍淵)과 포구와 어촌이 빗겨 볼 수 있어 참으로 가관(佳觀)이었다고 한다. 또 그의 아들과 관련하여 “산수헌의 아들 권중립(權中立)이 진안(鎭安) 현감으로 있었는데 이는 마땅히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부모를 봉양해야 하는 것이 유가(儒家)의 도리가 아닌가”라고 하였다는 말도 전해져 그 당시 유가 사상을 짐작하게 한다.
권진응은 우암 송시열(宋時烈)이 제주도 유배 중 머물렀던 가옥을 돌아보고 지역 유지와 유림에게 유허비를 세우도록 제안하고 직접 유허비의 비문을 썼다. 그렇게 세워진 유허비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오현단(五賢壇)에 지금도 남아 있다. 권진응은 1772년(영조 48) 나이가 예순이 넘었다고 하여 특별 사면되어 유배에서 풀려났고, 1775년(영조 51) 병으로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