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6007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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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虐殺-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장윤식 |
소재지 | 섯알오름 학살터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1592-2, 1597-2번지 일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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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있는 4·3 유적지.
[개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당국에서는 전국적으로 보도연맹원을 체포 구금했다. 이때 제주지구 계엄당국에서도 820명의 주민을 검속했다. 당시 모슬포 경찰서 관내 한림·한경·대정·안덕 등지에서도 374명이 검속됐는데, 이들 중 149명을 대정읍 상모리 절간 고구마 창고에 수감하였다가 1950년 8월 20일[음력 7월 7일] 새벽 4~5시경 집단학살하였다. 이보다 앞서 이날 새벽 2시경 한림지서에 검속되었던 63명도 계엄당국에 의해 집단총살 당하여 이곳에서의 희생자는 212명에 이른다.
[변천]
섯알오름 학살터는 일본군이 1944년 말부터 대정읍 ‘알뜨르’ 지역을 군사요새화 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폭탄 창고 터이다. 당시 일본군은 야트막한 섯알오름의 내부를 파내어 폭탄 창고 터로 사용했으며, 폭탄 창고 터가 있는 오름의 정상부에는 두 개의 고각포진지를 구축했다.
이 폭탄 창고 터는 일제가 패망하면서 제주도에 진주한 미군에 의해 폭파됐다. 이때 오름의 절반이 함몰되면서 큰 구덩이가 만들어졌는데 이 구덩이에서 학살이 이루어졌다. 학살이 시간 간격을 두며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기 때문에 암매장 구덩이도 두 개가 만들어졌다.
학살터의 보존을 위해 2002년 백조일손유족회 중심으로 ‘학살터 매입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매입을 추진했고, 2005년 제주 4·3 연구소의 ‘4·3 유적 종합정비 및 유해발굴기본계획’이 수립되면서 제주도 주관으로 학살터 정비사업이 이루어졌다.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정비사업에 의해 부지매입과 함께 위령제단[추모비·상석·향로·병풍석·내력비] 설치, 추모의 길 조성, 학살터 재현시설 완공, 주차장·추모정 준공 등이 이루어졌다.
[위치]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 1592-2, 1597-2번지 일대로 섯알오름의 서쪽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희생자의 유해 수습은 여러 가지 난관에 부딪쳤다. 우선 학살 당일 소문을 들은 유족 300여명이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학살현장에 모여들어 27구 정도의 유해를 구덩이 밖으로 인양하여 수습하던 중 군 당국의 무력저지 때문에 꺼내 놓은 시신마저 다시 구덩이에 놓은 채 수습을 포기해야 했다.
6년여가 지난 1956년 3월 30일 당시 한림지서에 수감되었다가 희생된 63구의 시신이 유족들에 의해 수습되어 한림면 금악리 공동장지에 안장했다. 이 소문을 들은 모슬포지서 수감 희생자 유족들이 1956년 4월 28일 시신수습을 시도했으나 또 다시 군의 저지로 무산됐다.
하지만 유족들의 끈질긴 진정과 요구로 경찰, 군으로부터 시신발굴허가를 받았고, 1956년 5월 18일 발굴을 통해 149구의 시신을 수습했다. 이중 육안으로 식별이 가능한 17구의 시신을 제외한 132구는 백조일손 묘역에 안장했다.
이때 시신수습이 이루어졌지만 1961년 당시 작업인부에 의해 유골 2구가 발굴되는 등 수습되지 못한 유해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 무성했다. 이에 백조일손유족회는 당국의 허가를 받고 2000년 11월부터 2001년 2월까지 추가발굴을 했는데 유골잔해 34점, 탄피 1,700점 등이 발굴됐지만 추가로 드러난 유해는 없었다.
[현황]
유적지 정비사업에 의해 성역화가 이루어졌고 매해 음력 7월 7일 ‘섯알오름 예비검속희생자 합동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의의와 평가]
제주도 예비검속 사건의 현장으로 보존과 정비를 강화하여 역사교훈의 장으로 활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