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6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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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蔡之洪 |
영어음역 | Chae Jihong |
이칭/별칭 | 군범(君範),봉암(鳳巖),삼환재(三患齋),봉계(鳳溪),사장와(舍藏窩)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암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전호수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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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암리 |
성별 | 남 |
생년 | 1683년 |
몰년 | 1741년 |
본관 | 인천(仁川) |
대표관직 | 공홍도도사(公洪道都事) |
[정의]
조선 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군범(君範), 호는 봉암(鳳巖)·삼환재(三患齋)·봉계(鳳溪)·사장와(舍藏窩).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채영용(蔡領用)이다.
[활동사항]
채지홍(蔡之洪)[1683~1741]은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봉암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났는데, 8세 때 “달이 동산 위에 떠오르니 그 모습이 태극과 같구나[月出東山上 形如太極初]”라는 시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0세 때 『주역(周易)』의 뜻을 이해하였고, 『서전(書傳)』의 ‘기삼백(碁三百)’까지 물었다고 한다.
16세 때부터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권상하의 문인인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외암(巍巖) 이간(李柬) 등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닦아 성리학으로 크게 이름을 떨쳐 이른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으로 불렸다. 강문팔학사란 권상하 문하의 채지홍·한원진·윤봉구·이간·화암(華巖) 이이근(李頤根)·관봉(冠峰) 현상벽(玄尙璧)·매봉(梅峰) 최징후(崔徵厚)·추담(秋潭) 성만징(成晩徵) 등 학문적 명성을 얻은 여덟 제자를 가리키는데, 강문팔학사는 권상하가 청풍(淸風)의 황강(黃江)에서 이들을 가르친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특히, 채지홍은 일찍이 학문에 뜻을 두어 권상하에게 과거 공부를 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할 것을 청하여 허락 받고 경전 연구 및 의리학 연마에 평생을 바쳤다. 1718년(숙종 44) 학행으로 추천되어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1721년(경종 1) 세자시강원자의(世子侍講院諮議)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신임사화(辛壬士禍)로 노론(老論)이 실각하자 김일경(金一鏡) 등 소론(少論)의 죄를 논척(論斥)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화(禍)가 권상하·송시열 등에게까지 미치자 세상에 뜻을 버리고 구운산(九雲山)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썼다.
1725년(영조 1) 노론이 다시 기용되고 권상하의 관작이 회복되면서 채지홍도 세자익위사부수(世子翊衛司副率)·경연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으면서 상소를 올려 송시열의 무옥(誣獄) 사건을 통렬하게 논했다. 이후 여러 차례 관직에 추천되었으나 나아가지 않다가 마지못해 빙고별제(氷庫別提)에 취임하였다가, 수개월 후 부여현감으로 나아갔다. 1740년(영조 16) 형조좌랑·공홍도도사(公洪道都事) 등을 잠시 지내다가 사퇴하고 귀향하였으며, 이듬해인 1741년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사상]
학문에 전념하여 당대 성리학 대가의 한 사람으로 명성을 얻었고, 친소귀천(親疎貴賤)의 구별이 없이 가르쳐 따르는 제자가 매우 많았다. 당대 성리학의 일대 논쟁이었던 인물성동이론과 관련해서는 스승인 권상하와 한원진의 의견을 좇아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 즉 호론(湖論)의 입장을 지지하였다. 즉, 이(理)는 기(氣)에 의하여 유행하지만, 기의 분열 운동에 이가 내자한다고 하여 논리상에서 이의 주재성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기발(氣發)과 미발(未發)의 문제에서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지지했으며, 그에 따라 인물성이론을 옹호하였다.
채지홍은 성(性)은 이와 기의 합성이라는 원칙 아래 천명(天命)의 성 역시 기를 떠날 수 없다고 보는 한편, 인간과 물은 타고난 기에 따라 각각 이를 받아 성을 형성하게 되므로 인간만이 오행(五行)의 기 중에서 정통(正統)한 것을 얻었으므로 인성과 물성은 다른 것이라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또한 이는 기 중에 있게 되므로 기를 따라 변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여, 음양오행의 정기(精氣)인 기의 정통과 편색의 차이로 인성과 물성이 달라진다고 하였다. 즉 기질지성(氣質之性)이 다르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현상 중에서 본연지성(本然之性)은 기질 중에 타재(墮在)한 것이므로 기질지성을 극복함으로써 본연지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한편 성리학뿐 아니라 관혼상제의 의례, 천하고금 치란(治亂)의 변화에 따른 성상(星像)·지리(地理)·산수(算數) 등의 분야에도 널리 조예가 깊었다.
[저술 및 작품]
문집으로 1783년(정조 7)에 간행된 17권 8책의 『봉암집(鳳巖集)』이 있다. 또 다른 문집으로 1책으로 된 『삼환재유고(三患齋遺稿)』가 있는데, 서(序)·기(記)·발(跋)·서(敍)·설(說)·잡저(雜著) 등 주로 산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개별적인 주제에 대한 저술로는 『성리관규(性理管窺)』, 『세심요결(洗心要訣)』, 『독서전보(讀書塡補)』, 『천문집(天文集)』 등이 있다. 1932년 진천군에서 펴낸 『상산지(常山誌)』에 진천읍 기암리 잠덕산에 있던 지장사(地藏寺)에 들렀다가 지은 시 한 수가 실려 있다.
[상훈과 추모]
1825년(순조 25) 지역 유림들이 문백면 봉죽리 봉암마을에 사우인 봉암 향현사(鳳巌鄕賢祠)를 세워 제향하였는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