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70065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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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阜 |
영어음역 | I Bu |
이칭/별칭 | 자릉(子陵),행원(杏園, 杏院)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송두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전호수 |
성격 | 문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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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송두리 |
성별 | 남 |
생년 | 1482년 |
몰년 | 1555년 |
본관 | 고성(固城) |
대표관직 | 홍문관교리 |
[정의]
조선 전기 충청북도 진천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자릉(子陵), 호는 행원(杏園, 杏院). 증조할아버지는 부정(副正) 이신(李晨)이고, 아버지는 사과(司果) 이금(李嶔)이며, 어머니는 사맹(司猛) 최윤태(崔允泰)의 딸이다.
[활동사항]
이부(李阜)[1482~1555]는 지금의 진천군 진천읍 송두리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외할아버지에게 수학하여 경적(經籍)에 두루 통하였는데 과거에 응시할 것을 권하자 ‘노모를 모셔야 하는데 제가 슬하를 떠나면 누가 있어서 봉양하겠느냐’며 조석으로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으면서 정결하게 하고 헌신적으로 봉양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를 하고도 다시 3년을 더하여 6년 동안이나 시묘하면서 조석으로 곡하기를 한결같이 하였다. 음식도 죽만 먹었으며, 제사 음식도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손수 지어 올려 주위에서 탄복하면서 하늘이 낸 효자라고 하였다.
사림파로서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와 교유하였고, 1519년(중종 14) 현량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사간원정언을 역임하였다. 사간원정언으로 있을 때 조광조 등과 함께 중종반정 공신에 대한 삭훈을 상소하였으나, 중종이 허락하지 않아 사헌부와 사간원이 사직할 때 병을 칭하여 낙향해 고암천(孤岩川) 도종리(道宗里)의 산수 간에 묻혀 독서와 낚시로 세월을 보냈다. 1519년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 사림 세력이 숙청될 때 벼슬에서 떠나 있어 화를 면하였다.
1545년(명종 즉위년) 조광조의 관작이 회복되자 다시 병조좌랑에 제수되었고, 홍문관교리겸춘추관기주로 전임되었으나 사양하고 향리에 머물다가 1555년 7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일찍이 학식과 조행(操行)으로 추천되었으며, 맑은 조행과 높은 절개가 일세에 뛰어났으므로 주위의 흠향을 받았다.
[묘소]
묘소는 진천군 진천읍 송두리 신풍산(薪豊山)에 있다.
[상훈과 추모]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에 있던 백원서원(百源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