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23000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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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宣弓神道碑-遺墟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금호리 464-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장윤수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9년 8월 31일 - 김선궁 신도비 및 유허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54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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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김선궁 신도비 및 유허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재지정 |
건립 시기/일시 | 1803년 - 김선궁 유허비 조성 |
건립 시기/일시 | 1862년 - 김선궁 신도비 조성 |
이전 시기/일시 | 1915년 - 김선궁 신도비 및 유허비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금호리 464-1로 이전 |
현 소재지 | 김선궁 신도비 및 유허비 -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금호리 464-1 |
성격 | 비석 |
양식 | 석재 |
관련 인물 | 김선궁(金宣弓) |
재질 | 화강암|오석 |
크기(높이,너비,두께) | 유허비 200㎝[높이]|60㎝[폭], 신도비 250㎝[높이]|70㎝[폭] |
소유자 | 선산[일선] 김씨 대종회 |
관리자 | 선산[일선] 김씨 대종회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
[정의]
경상북도 구미시 해평면 금호리에 있는 비.
[개설]
김선궁(金宣弓)은 후삼국 시대 왕건(王建)과 연결된 선산의 강력한 호족으로 고려 태조의 공신이다. 김선궁 신도비(神道碑) 및 유허비(遺墟碑)는 2009년 8월 31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5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재지정되었다.
[건립 경위]
김선궁 신도비 및 유허비는 구미 지역의 대표적인 성씨인 선산 김씨(善山金氏)[일선 김씨(一善金氏)]의 시조 김선궁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위치]
구미시 해평면 금호리 미석산 아래에는 순충공(順忠公) 김선궁의 재사(齋舍)인 미석재(彌石齋)가 있다. 미석재를 중심으로 뒤편에 묘소가 있고, 앞쪽에는 유허비와 신도비가 있다. 유허비는 1888년 비봉산 아래 봉하루(鳳下樓)로 이건하였다가, 1915년 다시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형태]
유허비는 높이 200㎝, 폭 60㎝ 규모로 1803년(순조 3) 건립되었다. 신도비는 1862년(철종 13)에 건립되었고 이수(螭首), 비신(碑身), 하대석으로 구성되었다. 이수는 재질이 화강암이며 높이 80㎝, 너비 126㎝, 두께 78.5㎝ 규모이다. 비신은 재질이 오석이고 높이 222.5㎝, 너비 76㎝, 두께 상부 43.5㎝, 하부 45㎝ 규모이다. 하대석은 재질이 화강암이고 높이 21㎝, 너비 149.5㎝, 두께 111㎝ 규모로 총 높이 323.5㎝이다. 이수는 직육면체이며 앞뒤 면에 두 마리 용과 구름 등이 음각되어 있다. 하대석은 직육면체이고, 각 면 모서리를 사선으로 다듬었으며 윗면에 한 단의 낮은 받침을 두었다.
[금석문]
신도비의 비문은 각 면에 모두 새겨져 있다. 앞면 상부에는 전서로 ‘고려 순충공 일(高麗順忠公一)’, 뒷면 상부에는 ‘선 김공 신도비(善金公神道碑)’라고 새겨져 있다. 본문은 행서이며 찬(撰)은 외예손(外裔孫) 류주목(柳疇睦), 서(書)는 홍택주(洪宅疇)[1816~1886], 전(篆)은 31세손(代孫) 김익용(金益容)이 하였다.
본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고려 태조가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을 섬멸하고 통일을 이루게 되었는데 김선궁은 공신 중 한 명으로 정난 보국 공신(靖難輔國功臣)에 봉해졌다. 신라 알지왕의 30세손이고 고향이 일선[현 선산]이다. 그래서 일선[선산]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15세 때 아버지가 다른 사람에게 봉변을 당하자 그 사람을 찾아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목을 베었다. 그러고는 관가로 가서 본인의 죄를 알리고 옥에 갇혔다. 조정에서는 어린아이가 효성이 깊다 하여 죄를 사면해 주었다.
김선궁의 두 아들 김봉술과 김봉문을 비롯한 후손들은 조상을 빛내고 높은 관직에 올랐다. 김선궁의 묘가 선산 고을 동쪽 해평현 미석산에 있다. 그러나 그곳에 두 개의 묘가 있어 어떤 묘가 그의 묘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이에 1767년 후손들이 제단을 마련하고 표석을 세워 제사를 지냈으며, 1803년 유허비를 건립하였다. 이후 류주목이 글을 짓고 홍택주가 글씨를 써 신도비를 세웠다.”
[현황]
순충공 김선궁의 재사인 미석재에서 매년 음력 10월 1일 향사를 지내고, 종친들이 묵고 가기도 한다.
[의의와 평가]
김선궁 신도비 및 유허비를 통하여 선산 김씨의 시조 순충공 김선궁에 얽힌 이야기, 즉 “태조 왕건이 선산 지역에서 후백제 신검과 마지막 결전을 벌일 때 자원하여 전투에 나서 큰 공을 세워 고려 개국 공신으로 이름을 올렸다. 왕건이 특별히 아껴 자신의 활을 하사하여 ‘선궁’이라는 이름을 내렸다”는 등 시대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