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2006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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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無學大師 |
이칭/별칭 | 자초(自超),계월헌(溪月軒) |
분야 | 종교/불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종교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동작구 |
시대 | 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선희 |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 지역에 사자암을 창건한 조선 전기 승려.
[개설]
무학대사(無學大師)[1327~1405]의 성은 박씨(朴氏)이고, 법명은 자초(自超)로 ‘무학’은 호이다. 당호는 계월헌(溪月軒)이다. 경상도 합천 삼기(三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인일(仁一)이다.
[활동 사항]
1344년(충혜왕 5)에 출가하여 소지(小止)의 제자가 되고, 부도암(浮屠庵)에 머물며 혜명국사(慧明國師)로부터 불법을 배웠다. 이후 진주(鎭州) 길상사(吉祥寺), 묘향산 금강굴(金剛窟) 등에 머물렀다. 1353년(공민왕 2)에 원나라로 가서 인도 승려 지공(志空)을 만나고, 나옹(懶翁)을 찾아가서 불도를 닦다가 1356년 귀국하였다. 1358년(공민왕 7)에 나옹이 고려로 들어왔다. 다음해에 원효암에 있던 나옹을 찾아간 후 함께 머물렀다. 1376년(우왕 2)에 나옹이 회암사(檜巖寺)를 창건하고 수좌로 삼고자 하였으나 사양하였다. 같은 해 나옹이 입적하자 전국의 산천을 돌아다니며 한 곳에 기거하지 않았다. 공양왕이 왕사로 삼으려 했지만 따르지 않았다.
1392년(태조 1)에 태조가 왕사로 책봉하였다. 출생지인 삼기는 승격되었다. 다음해에 개경에서 왕도를 옮기기 위해 태조를 따라 계룡산과 한양 등을 함께 다닌 후 한양이 새 도읍지로 정해졌다. 만리현(萬里峴)에 호압사(虎壓寺)를, 국사봉에 사자암(獅子庵)을 건립하여 한양의 안정을 도모하였다고 전한다. 1393년(태조 2)에 회암사와 광명사(廣明寺) 등에 머물렀다. 1398년에는 용문사(龍門寺)에 머물렀는데 1402년(태종 2) 왕명으로 회암사로 옮겨 머물렀다. 그러나 다음해 다시 사퇴하고 금강산 진불암(眞佛庵)으로 들어갔다. 1405년(태종 5) 금강암에서 향년 78세, 법랍 62세로 사망하였다.
[사상과 저술]
저서로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 『인공음(印空吟)』, 『무학대사어록(無學大師語錄)』 등이 있었다고 하나, 『인공음(印空吟)』 1권과 『무학대사어록(無學大師語錄)』 1권은 현전하지 않는다.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는 전라남도 순천 송광사에 소장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1410년(태종 10)에 상왕으로 있던 태조가 강력하게 요청하여 태종이 시호를 내리고 변계량에게 비명을 짓게 하였다.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8-1에 보물로 지정된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