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7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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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柳重臨 |
영어음역 | Ryu Junglim |
이칭/별칭 | 류중림,대이(大而),문성(文城)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명우 |
[정의]
조선 후기 안산 출신의 의관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대이(大而), 호는 문성(文城). 아버지는 숙종 때 두창(痘瘡)[천연두) 치료로 이름이 높았던 의관이자 행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던 유상(柳瑺)이다.
[활동사항]
유중림(柳重臨)[1705~1771]은 여러 형제 중 유일하게 아버지의 의술을 이어받았다. 1721년(경종 1) 진사가 되었고 처음에는 업유(業儒)를 지내는 등 군문(軍門)에 출입하였다. 1741년(영조 17) 소기만호로 근무하면서도 두의(痘醫)로서 이름이 높았으며, 약방도제조 김재로(金在魯)의 추천을 받아 태의원의약(太醫院醫藥)을 지냈다. 1746년(영조 22) 통정대부에 오른 뒤 오위부호군·첨지중추부사·장무관 등을 역임하였다.
1761년(영조 37) 자헌대부에 가자(加資)되었다. 오랫동안 내의(內醫)로 종사하면서 화량첨사·연천현감·주문도첨사를 지내기도 하였으나, 곧바로 의관으로 복귀하였다. 특히 1748년(영조 24) 천수첨사에 임명되었을 때는 임금이 멀리 보낼 수 없다 하여 화량첨사와 맞바꿔 부임하게 할 만큼 신임이 높았다. 『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 편찬 이후 태의원내의(太醫院內醫)가 되어 서반(西班)의 녹, 즉 군직의 녹을 받으면서 의무에 종사하였다.
[저술 및 작품]
산림경제에 관심이 높았는데,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山林經濟)』가 폭넓은 항목에 비해 농업 부문에 대한 내용이 소략한 점을 아쉬워하여 오랜 세월 많은 서적을 참고하면서 수정·첨삭·보완을 거쳐 1766년(영조 42) 박물지(博物志) 성격을 띤 『증보산림경제』를 편찬하였는데, 서문은 임희성(任希聖)이 썻다.
『증보산림경제』는 복거(卜居)·치농(治農)·종수(種樹)·양화(養花)·양잠(養蠶)·목양(牧養)·치포(治圃)·섭생(攝生)·종덕(種德)·징악부(徵惡附)·치선(治膳)·구황(救荒)·가정(家政)·택언(擇言)·초구사(抄求嗣)·구급(救急)·증보사시찬요(增補四時纂要)·선택(選擇)·잡방(雜方)·동국산수록(東國山水錄) 등으로 분류하여 필사하였다.
조선 후기 농업 기술 및 농업 경영론의 변화를 살피는 데 중요한 자료이며,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편 조선 후기 안산 지역에서 문학·예술 활동을 벌인 인사들을 안산15학사라 하였는데, 유경종(柳慶種)은 그를 가리켜 ‘글 속의 밝은 달’로 표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