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500489 |
---|---|
한자 | 無形遺産 |
영어의미역 |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무형 유산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안산시 |
집필자 | 유주영 |
[정의]
경기도 안산 지역을 기반으로 발달한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 가치가 큰 문화재.
[개설]
무형문화재는 연극·음악·무용·공예기술 등의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큰 것을 말한다. 지정 대상에 실질적인 형체가 없기에 기능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이 지정의 대상이 되며, 지정된 사람을 무형문화재보유자(重要無形文化財保有者) 또는 인간문화재(人間文化財)라 한다.
『문화재보호법』에 따르면 “중요무형문화재의 지정은 문화재를 지정할 때 그 문화재의 보유자[보유단체]를 인정하여야 하며 또 추가로 인정할 수 있다.”고 되어 있다. 또한 ‘문화재의 전승보전을 위하여 전수교육을 실시하며 그 비용은 국가가 부담’하고 ‘매해 1회 이상 중요무형문화재의 공개[전시]’해야 한다.
1968년부터 정부는 무형문화재의 기능보유자로 지정받은 이들에게 생계비 및 특별 장려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는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생계로 인하여 지정 분야에 대한 연구 등의 활동이 지장 받지 않게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그 외에도 전수를 받고자 하는 이수자에게는 소정의 장학금이 지급되며, 전수회관이 건립되어 있다.
무형문화재의 종류로는 음악·무용·연희·놀이·의식·무예 등의 전통 연행과 도사공예·금속공예·목칠공예·섬유공예·피모공예·지공예·석공예 등의 공예기술, 그리고 궁중음식·의례음식·민가음식 등의 음식 제조가 있다. 문화재청장이 문화재보호법에 의거하여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정하는 국가무형문화재와 시장 또는 도지사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아니한 문화재 중 보존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것을 조례에 의거하여 지정하는 지방무형문화재가 있다.
[현황]
2009년 현재 안산 지역에 현존하는 무형문화재는 없다. 다만 안산 지역에 거주하였던 연고가 있는 무형문화재로 발탈[재담] 예능 보유자인 박해일과 유기장 이봉주, 옥장 김용철 등이 있다.
1. 발탈 박해일
발탈은 발에 탈을 쓰고 노는 놀이로 탈춤놀이와 꼭두각시놀음의 중간 형태이다. 크게 재담과 발탈놀이로 구성되며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경기도 안성 지방 남사당패가 행하던 꼭두각시놀음의 변형으로 추정된다. 주된 등장인물로 탈꾼과 주인, 여자가 있다.
탈꾼이 가로 2m, 세로 1m 정도의 검은 사각 포장막 안에 누워 내놓은 발에 탈을 쓰고 대나무로 만든 팔을 옆으로 벌려 움직이며 노래와 춤, 재담을 한다. 어물전 주인은 포장막 밖에 서서 회색 바지와 저고리에 조끼를 입고 탈꾼을 상대하며, 여자는 노랑저고리에 빨간 치마 차림으로 등장한다.
팔도유람객인 발탈이 어물전 주인을 만나 경기도 이북 지역을 유람하는 노래를 하다가 먹는 타령을 하는 것으로 내용이 구성되며 피리·해금·북·장구 등의 삼현육각(三絃六角)이 반주를 한다. 피라미·조기·소·말·돼지·굼벵이 등을 먹고 ‘네 불알도 떼어먹는다’는 타령을 하고 난 후 조기를 헤아리는 재담을 한다. 곰의 쓸개를 비롯하여 ‘불알이 두 개인데 너 하나 나 하나 먹는다’라는 식의 먹는 이야기를 한다.
발탈은 줄인형극의 조정 형식과 장대인형극의 조정 형식을 갖춘 인형극의 성격과 함께 가면극으로서의 성격도 가미되어 있다. 또한 서민의 애환을 담은 이야기 속에는 해학과 풍자가 생생하게 살아있을 뿐 아니라 사회를 향한 예리하고 비판적인 시각이 잘 반영되어 있다고 평가받는다.
발탈이 남사당패에서 기원하였다고 본다면 오명선계 발탈은 계승자인 남형우가 세상을 떠난 후 명맥이 끊겼고, 김덕순·조갑철·박춘재 계의 발탈이 발탈 초대예능보유자인 이동안에게 이어져서 박해일·김응수·김경원 등에게 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박해일은 1996년 5월 국가무형문화재 제79호 발탈 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이후 경기도 안산 지역에 거주하며 활동하다가 2007년 별세하였다.
2. 유기장 이봉주
유기는 흔히 ‘놋그릇’이라 불리며, 유기장은 놋쇠로 각종 기물을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장인을 말한다. 놋쇠는 구리를 주성분으로 하여 주석과 아연 등을 섞은 합금 금속으로 각 성분의 비율에 따라 유기 역시 다양한 빛깔과 명칭을 가진다. 구리와 아연의 합금 금속으로 만든 노르스름한 그릇을 황동유기라 하며, 구리에 니켈을 합금하여 만든 흰 빛 그릇을 백동유기라 한다.
우리나라 유기의 역사는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신라시대에는 유기를 제작하던 국가 전문기관인 철유전(鐵鍮典)이 있었다. 조선시대 이후에는 전국 각지로 전파되어 일상용기화 되었으나, 일제강점기에 공출 물품이 되면서 퇴보하기 시작하였다. 광복 이후 한때 유기의 제작이 성행하였으나, 연탄가스에 쉽게 변질되는 점 때문에 거의 생산이 중단되었다.
제작 기법에 따라 방짜와 주물·반방짜 등이 있으며, 이 중 방짜유기가 가장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방짜유기는 동 1근과 주석 4~5량을 합금하여 만든 바둑알같이 둥근 놋쇠 덩어리를 여러 명이 망치로 쳐서 그릇으로 만든다. 이러한 방짜 방식으로는 식기 외에도 징이나 꽹과리, 놋대야 등의 다양한 형태를 만들 수 있다.
아연이 들어가지 않아 식기로 사용되기 적합하고, 금속 타악기가 보급되면서 고려시대부터 방짜 제품이 크게 발달하였다. 그러나 놋그릇이 대중화되고 방짜 방식으로 유기를 만드는 것이 번거롭다 하여 값비싼 방짜보다 아연합금의 주물이 선호되기도 하였다. 방짜유기 중에서는 특히 북한의 납청 유기가 유명하며, 바로 이 부문의 국가무형문화재로 이봉주가 지정되어 있다.
방짜유기장 이봉주는 평안북도 정주군 출생으로 1948년 방짜유기를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1983년 유기장으로 국가무형문화재 제77호로 지정되었다. 1994년 4월 안산시 성곡동 시화공단으로 ‘납청유기공방’을 이전하여 각종 방짜유기를 제작하였으나 현재는 경상북도 문경시로 이전하였다.
3. 옥장 김용철
옥은 각섬석(角閃石)의 하나로 반투명한 암녹색 내지 담회색의 보석을 말한다. 동양문화권에서 발달한 보석류로 옛사람들은 옥을 특히 신성하게 여겨왔다. 옥을 품에 지니고 장식하면 약효가 있다거나 잡귀를 물리칠 수 있다는 식의 믿음을 가져왔으며, 음양오행의 5덕인 인(仁)·의(義)·지(智)·용(勇)·각(角)을 상징하는 장신구로 쓰여왔다.
선사시대의 여러 문화유적에서 곱은옥, 관옥 등이 출토되고 신라시대의 여러 고분에서도 많은 수의 옥으로 만들어진 유물이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에서 옥이 널리 애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옥의 가공을 전담하는 경공장(京工匠)으로 상의원(尙衣院)에 소속된 10명의 옥장이 있었으며, 이들은 대개 장식품을 비롯하여 화장품을 넣는 작은 용기나 연적, 술잔 등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옥공예에서는 경도가 높고 조직이 치밀한 것을 좋은 옥으로 꼽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강원도 춘천의 대규모 옥광(玉鑛)에서 특별히 질 좋은 옥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암석질·동물질·식물질로 옥의 원석은 나누어지며, 이 중 빛깔이 은은하고 단단하며 부드러운 느낌이 난다고 하여 암석질을 최고로 친다. 옥은 재질 상 가공이 특히 어렵다. 원석을 채취한 후 갈라짐을 막기 위하여 일정 온도로 열처리를 하고 명주실으로 만든 실톱으로 자른다.
발틀 또는 물레를 이용하여 활비빔으로 가공하고 양은이나 철에 슨 녹으로 광을 내어 마무리하게 된다. 때리거나 쫄 수가 없는 연옥을 가공할 때에는 특별히 고운 모래인 ‘해옥사’와 물, 옆물레를 써서 자르고 갈아낸다. 이 후 조금 더 세밀하게 조각하기 위해서는 작은 정과 같이 생긴 도구를 사용한다. 이렇듯 복잡하고 세심한 과정과 다양한 도구를 사용하여 옥공예품은 만들어진다. 김용철은 1997년 경기도무형문화재 제18호 옥장으로 지정되었으나 2005년 사망하였다. 현재 둘째 아들인 김성운이 무형문화재 전수교육 보조자로 지정되어 명맥을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