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육신과 생육신, 단종을 따른 사람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0545
한자 死六臣-生六臣, 端宗-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강원도 영월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용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문무 관인

[정의]

조선 전기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어 사망한 조선 제6대 임금 단종을 따른 사육신과 생육신의 생애.

[개설]

사육신은 조선 제6대 임금 단종(端宗)[1441~1457, 재위 1452~1455]의 복위를 위하여 절의를 바친 여섯 명의 충신을 말한다. 박팽년(朴彭年)[1417~1456]·성삼문(成三問)[1418~1456]·이개(李塏)[?~1456]·하위지(河緯地)[1387~1456]·유성원(柳誠源)[?~1456]·유응부(兪應孚)[?~1456]가 사육신이다. 사육신은 1456년(세조 2) 6월 1일 명나라 사신을 위하여 마련한 창덕궁 연회에서 세조를 제거하려다 실패하고, 결국 사육신을 포함하여 사육신과 뜻을 함께 한 70여 명이 모두 잡혀 처형되었다.

생육신은 사육신처럼 죽임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평생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키며 관직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산 여섯 명의 인물로, 김시습(金時習)[1435~1493], 원호(元昊)[1396~1464], 이맹전(李孟專)[1392~1480], 조려(趙旅)[1420~1489], 성담수(成聃壽)[?~1456], 남효온(南孝溫)[1454~1492]을 일컫는다.

사육신 중 유응부는 무신(武臣) 출신이고, 그 외 5명은 다 세종(世宗)이 창설한 집현전의 학사로서, 당시 명망을 지니고 있었던 유신(儒臣)들이었다. 그들은 세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으며,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비롯하여 『동국정운(東國正韻)』의 편찬,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주해, 『치평요람(治平要覽)』의 저작, 『의방유취(醫方類聚)』의 감수 등 여러 문화사업에 참여하였다.

[세종과 문종의 당부]

사육신 등 집현전 학사들은 집현전에 입직할 때 세종으로부터 원손(元孫)[단종]을 보좌하라는 부탁을 받았다. 집현전 학사에 대한 신임은 문종도 한결 같았다. 문종은 자신이 세상을 떠나기 수개월 전 집현전 학사들과 밤이 깊도록 국사를 논의하다가 무릎 위에 있는 세손(世孫)[단종]의 등을 쓰다듬으면서 이르기를 “내 이 아이를 경들에게 맡기노라”라고 하였고, 술을 내다가 어좌(御座)에서 내려와 여러 학자에게 일일이 술잔을 친히 권하기까지 하였다. 이 때 학사들은 모두 법주(法酒)에 만취되어 그 자리에서 인사불성(人事不省)으로 쓰러질 정도로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단종복위운동의 실패]

1453년 10월 10일, 문종의 아우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단종을 보위하던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은 1455년 윤 6월 11일 경회루에서 단종에게 강제로 선위를 받아 제7대 임금 세조가 되니, 집현전 학사들은 이에 크게 반발하였으며 특히 사육신을 중심으로 상왕으로 물러난 단종을 다시 복위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러나 단종 복위 계획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으며 사육신은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사육신 박팽년]

사육신 중 한 명인 박팽년은 순천박씨 한석당(閑碩堂) 박중휴(朴仲休)의 아들이다. 자는 인수(仁叟), 호는 취금헌(醉琴軒)이고,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박팽년은 1434년(세종 16)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삼문 등과 함께 집현전 학사가 되어 여러 편찬사업에 참가하였다. 세종의 유명(遺命)을 받고 황보인(黃甫仁), 김종서(金宗瑞) 등과 문종을 보필하였으며,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자, 고명(顧命)을 받아 어린 단종을 돕다가 충청도관찰사가 되었다. 박팽년이 외직에 있을 때 수양대군이 황보인, 김종서와 안평대군[세종의 셋째 아들]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였다. 이후, 박팽년은 형조참판으로 임명되었으나 성삼문 등과 상왕[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탄로되었다. 세조는 박팽년의 재능을 아껴서 비밀히 불러, “만약 네가 나에게 마음을 돌린다면 살려주고 영화를 누릴 것이며, 또 너도 나의 ‘신(臣)’이라고 칭하지 않았느냐?”라고 하였으나 박팽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세조는 박팽년이 충청도관찰사 재직 시 상소한 문서를 조사하여 보니 신(臣)자가 있을 곳에는 거(巨)자가 있고, 거(巨)자가 있어야 할 곳에는 신(臣)자가 있음을 알고 대노하여 극형으로 처형하였다. 또 세조는 궁관(宮官)을 박팽년의 집에 보내어 박팽년의 아들 8명을 모두 잡아 처형하였다. 이때 박팽년의 집종이 자기 자식 하나를 대신 내어 주고 상전의 자식을 데려다 젖을 먹여 키워서 사육신 여섯 집에서 박팽년의 혈손만이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박팽년이 죽은 뒤 세조는 “박팽년은 이 세상에서는 난신(亂臣)이나, 후세에 가면 충신이리라”라고 하였다.

[사육신 성삼문]

성삼문은 사육신의 한 사람으로 자는 근보(謹甫), 눌옹(訥翁), 호는 매죽헌(梅竹軒)이고, 시호는 충문공(忠文公)이며, 창영성씨 성승(成勝)의 아들로 홍주(洪州) 노사동(魯思洞) 외각에서 태어났다. 1438년(세종 20)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1447년(세종 29)에는 중시(重試)에 장원급제하여 항상 임금의 측근에서 좋은 건의를 많이 하였다. 세종대왕이 만년에 숙환으로 온천에 갈 때 성삼문과 박팽년, 신숙주, 최항, 이개 등을 항상 대동하고 고문으로 삼았다.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이 1453년(단종 1) 김종서를 참살하고 집현전 여러 신하들에게 정난공신(靖難功臣)의 호를 내리니 모두들 차례를 따라 축하연을 베풀었으나 성삼문은 수치로 여기고 혼자만 연회를 베풀지 않았다. 단종 복위 사건이 발각되자, 세조는 명나라 사신이 돌아간 이튿날 친국(親鞫)을 열었다. “무엇 때문에 나를 배반했느냐.”라고 세조가 묻자 성삼문은 “옛 임금을 복위시키려 하였을 뿐입니다. 천하에 누가 그 임금을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제 마음은 이 나라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어찌 배반이라 할 수 있습니까? 나리는 평소에 흔히 주공(周公)을 인용하였는데, 주공도 이런 짓을 하였습니까? 제가 이 일을 꾸민 것은 하늘에 두 태양이 없고 땅에 두 임금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면 내가 왕위를 받을 당시에 이를 막지 않고 나에게 붙어 있다가 이제야 배반한단 말이냐?”라고 되묻자, “대세는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적극적으로 막지 못하니 물러나서 죽는 길이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쓸데없이 죽는 것은 소용없으니, 참고 오늘에 이른 것은 후일을 도모하기 위함이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너는 나의 녹을 먹지 않았느냐? 녹을 먹고 배반하는 자는 반역자다. 명색은 항상 상왕을 다시 모신다면서 사실은 자기 이익을 차리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라고 다시 따져 묻자, “상왕이 계신데 나리가 어찌 저를 신하로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저는 나리의 녹을 먹지도 않았습니다. 만약 믿지 못하겠거든 저의 집을 몰수하여서 계산하여 보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세조는 크게 노하여 무사들로 하여금 불에 시뻘갛게 달군 쇠로 성삼문의 다리를 찔러 꿰뚫고 팔을 잘라 버렸다. 그러나 성삼문은 안색을 변치 않고 조용히 말하였다. “나리의 형벌은 참혹합니다 그려.” 이때 신숙주가 세조 옆에 있는 것을 보고 성삼문은 크게 꾸짖었다. “나와 네가 집현전에서 있을 때 세종대왕께서 왕손[단종]을 품에 안고 산보하면서 군신(群臣)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세상을 떠난 후 그대들은 이 아이를 보호해 달라’고 하셨다. 그 말씀은 지금도 귀에 쟁쟁하거늘 너 혼자만은 잊어버렸단 말이냐? 네가 이렇게까지 못된 줄은 몰랐다.” 신숙주는 질려서 자리를 피하였다. 마침내 수레에 실려 사형장에 끌려가던 성삼문은 좌우를 돌아보고 말하였다. “너희들은 현명한 임금을 도와 태평성대를 이룩해라. 나는 돌아가 지하에서 옛 임금을 뵈오리라.” 성삼문이 죽은 후 가산을 몰수하면서 보니, 과연 세조가 즉위한 후의 녹은 하나도 먹지 않고 별실에 쌓아 두었으며, 자기 방에는 거적을 깔았을 뿐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살림이었다.

[사육신 이개]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는 한산이씨인 이색(李穡)의 증손으로 자는 청포(淸浦), 백고(佰高), 호는 백옥헌(白玉軒)이고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이개는 나서부터 총명하고 문장에 능하였는데 이는 대대로 내려오는 하나의 가풍이기도 하였다. 1436년(세종 18)에 등제하였고, 1447년(세종 29)에는 중시(重試)에 합격하여 호당에 들었고 벼슬이 직제학에 이르렀으며, 시문이 청절(淸節)하여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이개는 집현전의 여러 학자 중에서도 시가 제일이었지만, 몸은 제일 허약하였다. 1456년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고문을 받을 때 세조가 “너는 나와 연고가 깊은 자인데, 이러한 반역을 하느냐?”라고 묻자 “예로부터 삼촌이 조카를 내쫓고 그 위(位)를 뺏는 임금을 보았느냐? 형의 뒤를 이어 내 욕심만 생각하니 더러운 말 다시 말고 어서 죽여 다오.”라고 하니 세조는 분을 이기지 못하여 가지고 있던 이도(利刀)를 내어 던지며 “너 죽어라!”라고 하자 이개는 그 칼을 얼른 받아 입에 물고 앞으로 엎어져 목숨을 끊었다.

[사육신 하위지]

사육신의 한 사람인 하위지는 자가 천장(天章), 중장(仲章), 호는 단계(丹溪), 시호는 충렬(忠烈), 본관은 진주(晋州)이다. 1435년(세종 17) 생원에 합격하였고, 1438년(세종 20)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호당에 들어가 독서하였다. 하위지는 성품이 잔잔하고 과묵하여 예의와 공경함이 있어 대궐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머리를 숙였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 등을 제거하자, 하위지는 벼슬을 버리고 전사간(前司陳)의 자격으로 선산(善山)에 물러가 있었는데 수양대군이 단종에게 청하여 좌사간(左司練)으로 불렀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1455년(세조 원년) 세조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고 예조참판으로 부르니 마지못해 취임하였으나, 녹을 먹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녹을 받는 대로 별실에 쌓아 두기만 하였다. 1456년에는 단종 복위를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세조에게 고문을 당하였다. 세조는 하위지를 잡아들여 말밤쇠[철조망]를 깔아놓고 버선을 벗고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하위지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두 발의 버선을 훨훨 벗고 발을 번쩍 들어 모래밭 밟듯이 밟고 들어가니 말밤쇠에 찔린 발에서 피가 낭자하였다. 세조가 “너도 항복하지 못하겠느냐?”라고 하니. 하위지는 크게 웃으면서 “충신을 욕보임도 죄 또한 큰 것이요, 보기도 싫고 듣기도 싫으니 어서 죽여 다오.”라고 하며 끝내 굴복하지 않고 순절하였다. 하위지가 처형되자 선산에 있던 두 아들도 연좌되어 사형을 받게 되었다. 작은 아들 하박은 어린 나이였으나 죽음을 두려워함이 없어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죽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아버지도 이미 살해되었는데 제가 어찌 혼자 살아남겠습니까. 조명(朝命)이 없더라도 자결해야 마땅할 입장입니다.”라고 하면서 비(婢)로 끌려가게 된 누이동생더러 여자의 의리를 지켜 두 주인을 섬기지 말 것을 부탁한 다음 태연히 죽었다.

[사육신 유성원]

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성원은 자가 태초(太初), 호는 랑우(琅玗)이며, 시호는 충경(忠景)으로 문화류씨인 사인(舍人) 유사근(柳士根)의 아들이다. 1444년(세종 26)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1447년(세종 29)에는 중시(重試)에 합격되어 호당에 들게 되었고 집현전에 뽑혀 이름을 떨쳤다. 문종 사후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제거, 교서를 만들어 그 공훈을 기록하려 할 때, 집현전 학사들이 모두 도망하였으나 유성원만이 혼자 잡혀서 협박을 당한 끝에 교서를 쓰고 집에 돌아와 통곡했다 전한다. 유성원은 성삼문, 박팽년 등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자 집에 돌아와 아내와 술을 나누고 유언을 한 후 가묘(家廟)에 들어가 배례한 다음, “불효 성원이 두 번 가명(家名)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죽습니다.”라고 하고는 할복 자결하였다. 이때에 금부(禁府) 나졸이 달려들어 즉시 유성원의 시체를 유성원의 아들에게 지우고 군기감(軍器監)에 와서는 세조의 명령으로 유성원의 살점을 쇠집게로 집어서 점점이 찢어 내게 하였다고 한다. 그때 유성원의 아들 유귀연과 유송연도 참형을 당하였다.

[사육신 유응부]

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응부는 자가 신지(信之), 호는 벽량(碧梁)이며, 시호는 충목(忠穆)이다. 그는 기계유씨(杞溪兪氏) 유수진(兪秀眞)의 증손으로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비록 집이 가난하여 곡식 하나 없어도 어머니의 마음을 위로하고 공경함에 있어서는 못할 것이 없었다. 그는 얼굴의 생김새가 엄장웅용(嚴壯雄勇)하며 활을 잘 쏘았다. 그리하여 세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와 평안도절제사(干安道節制使)를 지냈고 훈련도감(訓練都監)을 지낸 무인으로 1455년(세조 1년)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정2품에 올랐다. 단종복위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었을 때, 세조가 “너는 무슨 일로 반심(叛心)을 하느냐?”라고 묻자 유응부는 “상왕복위(上王復位)는 정도(正道)요. 불행히도 간인(奸人)의 밀고로 성취하지 못하였을 뿐이요.”라고 대답한 후 처참한 고문을 당하였으나 끝까지 불복하다가 순절하였다. 유응부의 아들 유사충(兪思忠)도 참형되었다.

[생육신 김시습]

김시습은 생육신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김시습의 자는 열경(脫卿)이고, 고려의 시중(侍中) 태현(台鉉)의 후손이다. 출생 여덟 달 만에 글을 알았고, 세 살 때는 시문을 지을 수 있었으며, 다섯 살 때 중용(中庸)과 대학(大學)에 통달하여, 신동으로 불리었다. 세종이 불러 시(詩)로 시험하고, 상으로 내린 비단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니, 나라 사람들이 오세(五歲)[신동 김오세]라고 칭하며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노산(魯山)[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자 김시습은 21세의 나이로 삼각산에서 글공부를 하고 있다가, 즉시 문을 닫아 걸고 3일 동안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대성통곡하며 책을 모두 불살라 버리고 미쳐서는 뒷간 오물에 빠졌다가, 그 길로 달아나 불문에 몸을 의탁하였다. 승명(僧名)은 설잠(雪岑)이며, 김시습의 호는 여러 번 변하였으니, 청한자(淸寒子)·동봉(東峯)·벽산(碧山)·청은(淸隱)·췌세옹(贅世翁)·매월당(梅月堂) 등으로 불리었다. 이후 김시습은 광인으로 자처하고 누덕옷을 입으며 새끼 띠를 띠고 걸식 행각으로 도처에서 광극(狂劇)을 연출하였다. 불교에 대해 관심이 깊었던 세조는 전국의 고승(高僧)을 모아 설잠의 설법을 듣게 하려고 할 때 김시습은 뒷간에 빠져 있었다. 조신(朝臣)들이 “김시습은 미친 서생(書生)이라 어찌 불법을 알겠는가?”라고 변명하자 세조도 불문에 붙였다. 그러나 고승들은 모두 김시습을 생불(生佛)이라 하고 김시습도 또한 불법을 잘 안다고 자부하였다. 1463년(세조 8) 김시습이 30세 되던 해에 서울에 들렸다가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간곡한 권고에 따라 내불당(內佛堂)에서 불경의 번역 사업에 협력한 바 있고, 세조의 숭불사업에 어느 정도 협력핬는데, 이때 역주(譯注)한 불전(佛典)이 곧 『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이다.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黎室記述)』에 의하면, 김시습은 불가(佛家)의 긍지를 잃지 않았고 선어(禪語)를 하기 좋아하며 미묘한 이치를 드러내므로 김시습의 변론에 저항한 이가 없었다고 한다. 김시습은 1493년(성종 24)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에서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시습은 죽기 전 유언으로 “화장하지 말고 절 옆에 임시로 매장하라.”라고 하였다. 3년 만에 열어보니 얼굴이 살아있는 것 같았다. 이것은 부처라 하여 마침내 화장하고 김시습을 위하여 부도(浮屠)을 세웠다. 그 후 정조(正祖)는 김시습의 영혼(英魂)과 의혼(義魂)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조판서 벼슬과 청간공(淸簡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또한 김시습은 영월 창절사를 비롯하여 국내 여러 서원에서 추모 향사되었다.

[생육신 남효온]

생육신 중 한 명인 남효온은 사람됨이 호탕하고 남보다 뛰어나서 속인들과는 달리 고사(高士)의 풍이 있었다. 남효온은 본래 의령(宜寧) 사람으로 호는 추강(秋江) 또는 행우(杏雨)라 하였다. 남효온은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학업을 닦았는데 선생인 김종직도 효온의 사람됨이 비범한데 놀라 남효온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항상 ‘나의 추강’이라고 불렀다. 또 효온은 효심이 지극하여 늙은 어머니의 말을 거역할 수가 없었기에 소과(小科)에만 응시하여 진사에 급제하고 대과(大科)는 보지 않았다. 이는 세조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지 않은 까닭이며 이로부터는 과거와는 등을 지고 절개를 지키는 충의의 선비가 되려고 전심하였다. 또 남효온은 그 유명한 지주부(止酒試)를 짓고 10년간이나 술을 끊었다 한다. 소과에 급제한 다음부터는 문하생을 데리고 교육 사업에 전념하였으며, 이로부터 사육신 전(傳)을 쓰기 시작하였고 매월 초하루만 되면 동천(東天)을 항하여 절을 하였다. 그런데 사육신 전을 쓰려고 하니 문하생들이 만류하여 “선생님 ‘사육신전’을 왜 만들려 하십니까? 이것이 세상에 나가면 반드시 화가 미칠 것이오니 깊이 생각하시고 넓게 생각하시옵소서.” 라고 진언하였다. 그러나 남효온은 한 번 결심한 마음을 돌이킬 수 없는 성격이어서 기어이 「사육신전」을 완성하고 말았다. 남효온은 「사육신전」을 완성하고 불과 39세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훗날 이 「사육신전」은 1504년(연산군 10)에 소릉(昭陵)에 대한 상소사건으로 인해서 결국 추죄(追罪)를 당하게 되어 화가 무덤 속에까지 미쳐 부관참시의 참혹한 형을 당하였다. 그 후 1506년(중종 원년)에 이르러 남효온에게 좌승지(左承旨)를 추증(追贈)하였고, 1784년(정조 8)에 다시 이조판서로 가증(加贈)함과 동시에 문정공(文貞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이로써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은 그 충의를 추모하여 영월 창절사와 고성(高城) 지봉서원(之峰書院)에서 향사하고 있다.

[생육신 이맹전]

생육신 중 한 명인 이맹전은 벽진(碧珍) 사람으로 호는 경은(耕隱)이라 불렀는데 병조판서 이심지(李審之)의 아들이다. 이맹전은 1419년(세종 1)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이란 벼슬을 하기 시작하였고, 그 후 1453년(단종 1)에 이르러 거창현감(居昌縣監)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고 백성을 잘 다스려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후 단종을 사사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현감의 직을 내어 놓고 선산(善山)으로 물러갔다. 이후 집에만 묻혀 두문불출하면서 30년을 지내는 동안 한 번도 대궐을 향하고 앉은 일이 없으며, 또 여러 번 세조의 부름에 불응하였고 매월 초하루만 되면 동쪽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경배하며 지냈다. 대궐을 향하여 앉은 일이 없음은 세조를 임금으로 모시지 않겠다는 증거였고 또 매월 초하루면 동천(東天)을 향하여 절한 것은 단종을 정말 임금으로 경배한다는 증거였다. 이맹전은 강정리(網正里) 고향에서 책과 더불어 세월을 보냈다. 누가 찾아오면 눈이 멀었다고 하면서 사람을 보지 않았다. “나는 나라가 망한 것을 본 사람인데 눈은 떠서 무엇 하나”라고 하며 멀쩡한 눈을 감고 장님이 되었다고 한다. 이맹전은 90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1781년(정조 5) 정조는 이맹전의 절의(節義)에 감동하여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정간공(靖簡公)이란 시호를 내렸다.

[생육신 조려]

생육신 중 한 명인 함안(咸安) 사람 조려는 호가 어계(漁溪)이며, 1453년(단종 원년)에 진사로 등제(登第)하였다. 1455년(단종 3) 수양이 왕위를 찬탈하였디는 소식을 듣고 수학하던 책을 내버리며 “이제부터는 더러운 조정의 과거에 응하지 않겠다. 이러다가는 나중에 권력 때문에 서로 살상까지 일어날 것이다.”라고 하고 함안군의 서쪽 원북동(院北洞)으로 들어가 더러운 세상을 개탄하며 조그만 한 초가를 짓고 지냈다. 단종이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한 후 상복을 입었다 하며 충분한 마음을 초야에 묻혀 달랬다. 조려는 일정한 곳에 있지 않고 때때로 이동하면서 산속 혹은 바닷가, 때로는 촌가에 나타나는 등 조금도 얽매인 생활을 하지 않았다. 조려의 고향 함안에서 영월까지 500여 리의 노정이었는데, 조려는 한 달에 세 번이나 영월로 가서 단종의 성수만세(聖壽萬歲)를 축원하였다 한다. 그 후 숙종 때 이조참판을 추증하였고 1781년(정조 5)에 이조판서 벼슬과 정절공(靖節公)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생육신 성담수]

성담수는 창녕 사람으로 호는 문두(文斗)이다. 1450년(세종 32)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후부터 국세가 기울어짐을 본 성담수는 일찍이 성삼문과 손을 잡고 단종을 위하여 사생(死生)을 같이 할 것을 언약하였다. 성삼문이 세조에게 잡혀 참살 당하자 담수도 잡혀 세조의 무자비한 국문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성담수는 한사코 문초에 불응하고 끝내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세조도 할 수 없이 김해(金海)로 귀양을 보냈다. 성담수는 김해에서 3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다가 특사로 파주(坡州)로 돌아와서 살게 되었다. 이 때 성담수의 조카 성몽정(成夢井)이 경기관찰사가 되어 찾아왔다. 집에 들어서 보니 다 쓰러져 가는 오막살이에 흙이 그대로 있는 방에 삿갓자리를 깔고 지내고 있었다. 몽정은 딱하여 눈물을 홀리며 탄식하고 돌아와 즉시 물자(物資)[돗자리]를 보내니 담수는 이런 비천한 집에 맞지 않으니 도로 가지고 가라고 한 일도 있었다. 성담수는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세조에 대한 반항심이 한층 더 맹렬해져서 마침내 분사(憤死)하고 말았다. 그 후 성담수는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서 1781년(정조 5)에 비로소 성담수의 충절을 인정하여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정숙공(靖肅公)이란 시호를 내려 성담수의 충혼(忠魂)과 의백(義魄)을 위로하였다.

[생육신 원호]

원호는 1396년(태종 5) 4윌 9일 병조참판이었던 원헌(元憲)의 둘째 아들로 지금의 원주시 개운동에서 태어났다. 15세에 이미 ‘도학군자’라는 세칭을 받았으며, 1422년(세종 5) 26세 되던 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원호는 학자로서 벼슬이 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고, 성삼문, 정인지 등과 집현전 학자로서 각종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으며 단종 초기에 세조의 세력이 날로 커지는 것을 보고 집현전 직제학의 자리를 사직하고 원주 남송촌(南松村)에 들어가 세상과 등졌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당하자 영월 서쪽에 나아가 집을 지어 호를 관란(觀瀾)이라 짓고 흐르는 물에 시를 읊으며 문을 닫고 독서에 몰두하였으나 마음은 항상 단종이 있는 데를 바라보고 울며 지냈다. 단종이 비참한 죽음을 당한 뒤에 무릉도원면 무릉리 모현사(慕賢祠) 자리에 토굴을 파고 여기서 기거하면서 3년상을 지내고, 복(服)이 끝나자 원주로 돌아와 문밖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원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원호의 사촌인 원효연(元孝然)이 하인들을 데리고 가지 않고 문간에서 뵙기를 청하여도 허락하지 않았다. 세조가 특별히 호조참의를 제수하여 불렀으나 죽기를 맹세하고 이에 응하지 않았다. 앉으면 반드시 동쪽으로 향하고 머리를 두니 이것은 노산상왕[단종]의 능(陵)이 동쪽에 있기 때문이었다. 원호는 이처럼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서 기개 높게 절제하는 생활을 하였으며 친지들 중에 조정에 벼슬하는 자들이 많이 와서 보기를 청하였으나, 절대로 만나지 않았다. 한 관찰사가 하인들을 떼어 놓고 평복으로 찾아가니 만났다가 관찰사임을 알고는 손을 내두르며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초옥(草屋)을 마련하고 종적을 감추어 그 부근은 항상 안개가 뒤덮였고,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무항리(霧巷里)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숙종 조에 최석정(崔錫鼎)의 건의로 정려를 내렸고, 정조는 원호의 의지(義志)와 충성심에 감동하여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정간(貞簡)이란 시호를 내렸다.

[상훈과 추모]

박팽년과 화를 함께 입은 성삼문, 하위지, 이개 등 사육신들은 1691년(숙종 17)에 복관(復官) 되었으며 1758년(영조 34)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충정공(忠正公)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 후 영조 1775년(영조 51)에는 어명으로 정려(施閣)케 하고 영월 창절사(彰節祠)를 위시하여 회덕(懷德) 정절사(靖節祠) 등에 향사(享祀)하였으며, 서울 노량진에는 사육신비가 건립되어 사육신의 충절을 추모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사육신과 생육신에 대한 평가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변화하였다. 세조 당대에 사육신은 역적이었고, 그로 인하여 그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 모두 화를 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생육신 중 한 명인 남효온이 「육신전(六臣傳)」을 남겼고, 이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등장한 사림파에 의해 사육신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시도되면서 사육신과 생육신은 점차 충의의 상징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인식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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