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300536
한자 壬辰倭亂
영어공식명칭 Hideyosi's invasion of Korea|Korean War|Japan's Invasion of Joseon in 1592'․Hideyosi invasions|limjinwaeran|The Imjin War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영월군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방기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592년 4월 13일연표보기 - 임진왜란 개전
종결 시기/일시 1598년연표보기 - 임진왜란 종전

[정의]

1592년부터 1598년까지 강원도 영월군을 포함하여 조선 전역을 침략한 일본군과의 전쟁.

[개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였고, 이튿날 부산진성을 공격하면서 일본과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군은 14일 만에 도성을 함락시켰고, 선조는 평안북도 의주군까지 피난하였다. 명군이 참전하여 평양성을 탈환하였지만, 명군은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후 일본과 강화 협상을 진행하였다. 강화가 결렬되면서 1597년 일본군이 다시 조선을 침략하였고[정유재란(丁酉再亂)],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露粱海戰)을 마지막으로 일본군은 조선에서 철군하였다. 1600년 9월에는 명군도 조선에서 철군하여 전쟁은 완전히 끝이 났다.

[역사적 배경]

1587년 6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는 쓰시마섬[對馬島] 도주 소 요시시게[宗義調]에게 조선 국왕을 내조케 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요시시게는 히데요시의 일본 국왕 등극을 알리고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는 가짜 일본국왕사를 파견하였다. 조선은 통신사 파견을 거절하였다. 1589년 히데요시가 다시 조선의 입조를 명하자, 요시시게는 직접 조선으로 와 통신사 파견을 청하였다. 이전과 다른 일본의 태도에 조선은 일본의 정세를 확인하기 위하여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귀국 후 통신사는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서로 다른 반응을 보였지만, 조선은 성의 수리, 무기 점검, 무신의 발탁 등 일정한 대비를 하였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성, 1592년 4월 15일 동래성을 함락한 후 일본군은 중로, 좌로, 우로로 나뉘어 도성을 향해 북상했다. 조선은 이일(李鎰)로 하여금 조령과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시 방면의 중로, 성응길(成應吉)에게 죽령과 충주시 방면의 좌로, 조경(趙儆)에게 추풍령·충청북도 청주시·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지역인 죽산 방면의 서로를 방어하게 하였다. 이와 함께 신립(申砬)을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삼아 문경새재를 지키게 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방어선이 모두 무너지면서 1592년 4월 30일 새벽 국왕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피난길에 올랐다. 1592년 5월 2일 한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팔도국할(八道國割)이라 하여 조선의 팔도를 일본군 편성에 따라 분담하였는데,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가 강원도를 담당하였다.

[경과]

강원도를 침략한 일본군은 요시나리 휘하 2,000여 명,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이끈 1,000여 명, 다카하시 모토다네[高橋元種]·아키즈키 타네나가[秋月種長]·이토 스케타케[伊東祐兵]·시마즈 도요히사[島津豊久] 휘하 1,000명 등 1만 4000여 명이었다. 한성을 떠난 요시나리 군은 1592년 6월 1일 지금의 강원도 철원군·지금의 강원도 김화군 지역인 금화·지금의 강원도 김화군, 강원도 창도군, 강원도 철원군에 있었던 행정 구역인 금성 등을 함락시키고, 지금의 강원도 통천군으로 향하였다. 1592년 6월 5일 지금의 강원도 회양군을 점령한 후 강원도와 함경남도의 경계인 철령을 점령하고 지금의 강원도 안변군인 함경도 안변으로 들어갔다. 이어 안변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지금의 강원도 삼척시를 점령하였다. 요시나리는 강원도 삼척시에서 군사를 나누어 한 부대는 지금의 경상북도 울진군으로, 다른 부대는 강원도 정선군에서 강원도 평창군을 공격하여 강원도 원주시로 향하였다.

일본군의 침략을 맞아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진별리에 살던 고종원(高宗遠)·고종길(高宗吉)·고종경(高宗慶) 형제가 의병 봉기하자, 영월군민 수백여 명이 의병에 합류하였다. 강원도관찰사 유영길(柳永吉)은 고종경에게 관군 500명을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 흥원진까지 통솔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동 중 탈영이 속출하여, 약속한 날짜에 흥원진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그러자 유영길은 고종경을 처벌하였다. 이는 영월군민들의 저항 의지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후 조선 조정은 허성(許誠)·서성(徐渻)·황정욱(黃廷式) 등을 강원도 지역으로 보내 의병을 모집하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일본군이 강원도 영월군 지역을 침략한 것은 1592년 8월인 것으로 여겨진다. 일본군 침략 당시 평창군수 권두문(權斗文)이 영월군수를 겸직하고 있었다. 1592년 8월 11일 권두문은 응암굴(鷹岩窟)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사로잡혔다. 그렇다면 강원도 영월군은 체계적으로 방어하지 못하였음이 분명하다. 1592년 8월 15일 일본군이 강원도 영월군 주천면, 1592년 8월 17일 영월군 하동면 진별리를 침략하였다. 의병 봉기를 하였던 고종원과 고종길은 노리곡굴로 피하였다. 노리곡굴고씨 일가족이 피신하였기에 고씨굴로 불리게 되었다. 1592년 8월 18일 일본군은 노리곡굴을 공격하였고, 고종원과 고종길은 일본군에게 사로잡혔다. 이때 고종원의 부인 조씨는 노리곡굴에서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592년 8월 19일 일본군은 진영을 영월군 영월읍으로 옮겼다.

[결과]

요시나리는 강원감사를 자처하면 민중들을 효유하면서 강원도 지역을 통치하였다. 강원도 평창군 지역의 경우 처음 일본군의 통치에 협조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군의 통치를 거부하였다. 이런 모습은 강원도 영월군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여겨진다. 명군이 참전하여 평양성을 탈환한 후 일본군이 한양에서 철수하면서 강원도 지역에 주둔하였던 일본군도 남쪽으로 이동하였다.

[의의와 평가]

1593년 4월 이후 강원도 지역은 더 이상 일본군의 침략을 받지 않았다. 따라서 일본과의 전쟁 중 강원도는 피란지와 후방 보급 기지로서 기능을 하였는데, 이런 모습은 영월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7년간의 전쟁이라는 국난 극복에 있어 강원도와 강원도 영월군이 일정한 기여를 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