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1322
한자 弱冠-抗日義兵將白頭山虎狼-申乭石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영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78년 11월 3일 - 신돌석 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6년 3월 13일 - 신돌석 영릉의진 결성 및 창의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08년 12월 12일 - 신돌석 사망
현 소재지 복디미 -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528-1 지도보기
현 소재지 황곡마을 골짜기 -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눌곡리 황곡지도보기

[정의]

개항기 태백산맥을 무대로 의병 활동을 펼친 영덕 출신 의병장 신돌석 이야기.

[개설]

신돌석(申乭石)[1878~1908]은 영덕 출신의 의병장으로 1906~1908년 영릉의진(寧陵義陣)을 이끌었다. '태백산 호랑이'는 신돌석을 풍자화한 이름이다. 신돌석은 태백산맥 여러 곳에 요새를 두고 탁월한 지휘력과 전투력으로 일본군 수비대를 여러 차례 격파했던 민족의 영웅이다. 축지법으로 신출귀몰하는 듯한 신돌석의 모습에 호랑이를 본 듯 일본군의 간담은 서늘해졌다.

[중인가문에서 태어나다]

신돌석은 1878년 11월 3일 경상도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 복평리(福坪里)[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528-1]의 일명 복디미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석주(申錫柱, 申淅柱)이고 어머니는 분성김씨(盆城金氏)이다. 위로 누나 두 명과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큰누나는 1890년 이웃 효촌마을 박수찬(朴壽燦)과 결혼하였고, 둘째 누나는 영양 석보면 화매 출신인 김영만(金永萬)과 결혼하였다. 남동생은 한 살 아래인 신태범(申泰範)이다. 아내는 청주한씨(淸州韓氏) 한재여(韓在汝)[1878~1952]로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축산리 128에서 태어났다.

신돌석의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순경(舜卿), 초명은 신돌선(申乭先), 본명은 신태호(申泰浩)이며, 이명으로는 신태을(申泰乙)·신환균(申環均)을 사용하였다. 신돌석은 어릴 때 불렀던 아명(兒名)이다. 고려 개국공신 신숭겸(申崇謙)의 후예로, 7대조인 진사 신후종(申厚宗) 때부터 영해에 들어와서 살았다. 그 뒤 가세가 점차 기울어져 신돌석 당대에 이르러서는 영해도호부 아전(衙前)에서도 밀려나 갓도 쓸 수 없는 평민 신분으로 떨어졌다. 신돌석이 장가를 들어 갓을 쓰고 의관을 가지런히 하여 집으로 돌아올 때, 그 모습을 본 이성화[신돌석에게 한문을 가르쳐 준 육이당(六怡堂) 이중립(李中立)의 동생]가 갓을 벗겨 부수어 버렸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이웃 상원(上元)마을의 진성이씨(眞城李氏) 문중 서당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이중립의 아들 이병국(李炳國)은 “신군과 내가 같은 마을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같이 책을 끼고 수업하였다”고 말하였다. 어린 시절 비범한 재능을 양반 자제들도 알아보았던 것이다.

[태백산 호랑이라 불리다]

신돌석이라 하면 빼어난 힘과 용력을 들 수 있다. 날랜 행동과 담용(膽勇)으로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칭으로 숭앙의 대상이 되었다. 힘은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 태어나면서부터 기운차고 용맹스러웠으며 목소리가 웅장하여 주위 사람들을 모두 놀라게 하였다. 체격도 남달리 크고 기운이 셌다. 그래서 스승 이중립이 신돌석을 범상치 않게 여겨 받아들였을 것이란 주장도 있다. 뿐만 아니라 신돌석을 추적했던 일본군조차도 ‘신돌석이 힘이 강하였다’고 보고한 것을 보면, 신돌석의 힘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신돌석에 관한 설화에서는 축지법이 자주 등장한다. 지품(知品)에서 대구를, 온정(溫井)에서 영해를 단숨에 다녀왔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산을 탈 때는 남들의 두세 배 정도 멀리 건너뛰었다고 한다.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칭이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러한 설화에는 신돌석이 남들에 비해 대단히 날랜 인물인 동시에 잔학한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는 민중의 바람과 정서가 담겨 있다. 신돌석은 평민 출신 의병장(義兵將)으로서 의병항쟁의 기념비적인 인물이다. 신돌석과 교류하였던 많은 사람들이 신돌석을 패기에 찬 큰 인물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알아보았다.

[18세의 혈기로 의병에 나서다]

신돌석이 의병 조직에 처음 발을 내디딘 것은 만 18세이던 1896년이었다. 『신장군실기(申將軍實記)』에 따르면 "병신년[1896]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날 때 김하락(金河洛) 의진에 종사하다 종적을 감추었다"고 하였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는 "신돌석이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서 다시 일어났다"고 하였으며, 「신장군유사(申將軍遺事)」에서는 "병신년 변란에 영해의병 중군장이 되었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활약상을 소개하고 있는 자료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1896년 6월 3일과 4일 이틀 동안 영덕대교 인근 남천쑤[남천숲]에서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다. 이때 김하락의진·영해의진·영덕의진이 연합의진(聯合義陣)을 구축한 후 첫날 전투에서 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다음 날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증원된 관군이 한꺼번에 밀고 들어오면서 의병들은 수세에 몰렸다. 결국 김하락이 총상을 입고 오십천에 투신하면서, 남은 의진과 병사들도 흩어졌다. 신돌석도 이 전투에 참여하였다가 피신하였다. 비록 패퇴하였지만, 훗날 의병 활동을 전개하는 데 중요한 경험이 되었을 것이다.

[화적·활빈당 활동에 참여하다]

1896년 전기의병에 참전했던 신돌석은 일단 전국을 돌며 여러 사람을 만나며, 나라를 구하기 위해 왜적(倭賊)을 청소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아버지 신석주로서는 자랑스럽고 든든했던 아들이 잘못될까 봐 걱정이 많았다. 그래서 가정을 꾸려 정착해 안정된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결혼을 주선하였다. 그때가 1902년 아니면 1903년경이다. 아내는 축산면 축산리 마을의 동갑내기 청주한씨(淸州韓氏) 한재여(韓在汝)였다. 의병에 참전하였다가 전국을 떠돌다 보니 결혼이 늦었다.

그렇지만 결혼이 신돌석을 집에 머물게 하지 못하였다. 1903년 여름에는 경상북도 청도(淸道) 지방을 지날 때 일본인들이 전신주를 가설하고 있는 것을 보고 분노해 일본 공병 5~6명을 때려눕히고 전신주를 뽑아버렸고, 부산항에서 일본 상선을 수리하고 있는 일본인들을 보고 이들을 바닷물에 처넣어 처단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당시 전국 각지에서 벌어지던 무장(武裝) 농민들, 흔히 말하는 화적(火賊)·활빈당(活貧黨) 활동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신돌석은 일본군의 추적을 피해 울산(蔚山) 송정마을의 친구 박상진(朴尙鎭)의 집을 찾아가 그곳에서 머물렀다. 이때 송정마을 지당(地唐)의 참물덩게에 돌다리를 놓았는데, 장정 몇 명이 달라붙어 돌을 올려놓으려는 것을 보고, 혼자 이를 번쩍 들어 올려 다리를 놓았다. 또 박상진의 당숙이 집 디딜방아를 놓을 때 역시 혼자 힘으로 놓았다. 송정에 피신해 있을 때 축지법을 썼다는 이야기도 박상진 집에 전해지고 있다. 신돌석의 용맹하고 날랜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이다. 한편, 이 무렵 신돌석은 경주 최부자 댁에 머물며 일제의 감시를 피하였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월송정(越松亭)에서 시 한 수를 읊다]

하루는 경상북도 평해(平海) 월송정에 올라가 기울어 가는 국운을 근심하면서 시 한 수를 읊었다.

등루유자각행로(登樓遊子却行路)[누각에 오른 길손 문득 갈 길을 잊고]

가탄단허락목횡(可歎檀墟落木橫)[단군의 터전에 낙목이 가로 누워 있음을 탄식하네]

남자이칠성하사(男子二七成何事)[남아 27세에 이룬 일이 무엇인고]

잠의추풍감개생(暫倚秋風感慨生)[잠시 가을바람에 의지하니 감회가 새롭구나]

신돌석이 월송정에 올라 읊었다는 이 시는 신돌석의 사상과 신념을 전해주는 유일한 작품이다. 무너져 내리는 민족과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優國)의 정서가 잘 드러나 있다.

[영릉의진을 일으키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기고 국정 전반을 간섭받기 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전국 각지에서 다시 의병이 일어났다. 우국의 시를 읊던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은 1906년 3월 13일 아우 신태범과 함께 집 근처인 축산면 도곡리 주점(酒店) 김춘궁(金春宮)의 집 앞에서 기병하였다. 유생들이 서원이나 향교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과는 달리 주점 앞마당에서 일으켰다는 것은 의병의 성격을 약간이나마 상징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신돌석은 의병부대 이름을 영릉의진이라 하고 의병장이 되었다. 이름을 왜 영릉이라고 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가산(家産)을 털어서 모은 의병의 수가 100~300명에 이르렀다. 광복 직후에 작성된 「창의장명록(倡義將名錄)」에는 영릉의진의 대표적인 인물 61명과 인물들이 맡았던 직책이 자세하게 밝혀져 있다. 이에 견주어 보면 당시 병사 수는 약 3천 명으로 추산된다.

10년 전 전기의병 때는 신돌석은 청소년이었지만, 이제는 변화와 성장을 거친 준비된 지도자였다. 무엇보다도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엄중했을 것이다. 영릉의진 결성 소식을 들은 영해군수 경광국(慶光國)이 큰 충격을 받고 신돌석을 회유하러 여러 번 찾아왔다가, “신돌석의 안광이 횃불과 같고 다리의 힘이 바다라도 뛰어넘을 듯한 용기를 가졌으니 참으로 장군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경광국도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의 풍모에 압도되었던 것이다.

[울진을 공격 목표로 삼다]

신돌석이 이끄는 영릉의진이 공격 목표로 삼은 곳은 울진이었다. 울진은 동해안 도시 가운데서 일본인들이 이주하여 발을 붙이기 시작한 곳이고, 이를 교두보로 일본의 어부와 수산업자들이 동해안 어장을 완전 장악하려 하고 있었다. 이를 지켜보는 울진 어부들은 극심한 고통과 좌절 속에서 생사를 걸고 투쟁을 벌여야 하였다. 신돌석이 이끈 영릉의진은 이를 직시하고 울진의 일본인 이주지와 일본인들을 공격대상으로 하였던 것이다.

신돌석은 군율과 군사들의 기강을 엄숙히 하는 한편, 이하현(李夏鉉)의 진보의진(眞寶義陣), 영천(永川) 정용기(鄭鏞基)의 산남의진(山南義陣) 등 주변 의진과도 협조적인 관계를 이루었다. 신돌석은 태백산맥을 동쪽으로 가로질러 영해를 거쳐 평해, 울진을 향해 북상하다가 원주진위대의 습격을 만나 남서쪽 방향으로 태백산맥을 훌쩍 넘어 첫 출발지였던 영양·진보 접경지역까지 단숨에 물러났다.

경상북도 청송과 영양을 중심으로 본진과 별도로 별동대를 운영하였다. 이들은 주로 부호들로부터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관아를 공격해서 무기 및 군수를 확보하여 의진을 정비하였다. 이처럼 무기는 관아를 장악하여 확보하는 방식이었지만 군자금은 부호가에게서 빼앗는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일반 서민들에게는 정당하게 대금을 지급하고 물품을 구입하였다. 청송군 관아와 영양군 관아 등에서 무기를 확보하여 남으로는 경주, 북으로는 울진을 오르내렸다. 그러는 동안 안동진위대의 습격을 받은 청송 이전평(梨田坪)전투에서는 도령장(都令將)을 맡은 처남 한용수(韓鎔洙)가 전사하는 아픔도 있었다.

신돌석은 의진을 이끌고 다시 북상길에 올랐다. 목표는 울진 공략이었다. 1906년 4월 15일 울진에 도착하여 일본인 이주지와 일본인을 공격하였다. 이때 울진의 순교감(巡校監) 관군과 전투를 벌였다. 얼마나 많은 수의 일본인을 공격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일본인 1명을 총살하고 일본인이 살던 집을 집중적으로 부수었다"고 알려진 사실 외에도 다수의 일본인들을 사살하고 일본인들이 맡겨놓은 돈도 압수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울진을 공략한 뒤 1906년 4월 17일 영해로 돌아온 뒤 약 3주 만에 다시 북상하였다. 곧바로 울진 관아 공격에 나선 것이다.

이때의 사실을 『황성신문』[1906. 6. 15]에서는 "의병 300여 명이 본부에 돌입하여 군기고(軍器庫)를 타파하고 군물을 빼앗고 민가에 방화하여 수십 호가 불에 탔다"고 보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의병부대는 무기를 확충하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울진 관아를 공략한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은 더 나아가 강원도 삼척 근덕면 장호동(莊湖洞)을 공격하여 일본 배 9척을 격파하였다.

[고향 영덕으로 진격하다]

신돌석의 움직임에 따라 관군과 일본군 수비대도 그 일대에 집결하였다. 또한, 대구·원주·경주 등지의 진위대(鎭衛隊) 병력도 출동하였다. 이들은 공동작전을 펴가며 남쪽에서부터 기습을 꾀하고 있었다. 신돌석은 이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의병부대를 이끌고 태백산맥의 산악지대를 이용하여 적의 집중 공격을 피하고, 혹은 해안선을 따라 적을 유인하면서 다시 영해 지방으로 내려와 1906년 5월 5일 읍성을 세 겹으로 포위한 뒤 선봉장 이하현이 서문을 부수고 공격하였다. 성안에서는 경비하던 병정들이 네 문을 닫고 남문으로 해서 영덕 지방으로 달아났으나 사상자가 많았다.

읍성을 장악한 신돌석은 영해 군수의 죄상과 의병을 일으킨 마땅함을 강조한 방(榜)을 붙이고 백성들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영해 관아를 공략한 신돌석은 내쳐 5월 12일 영덕 읍성도 공략하였다. 이렇게 되자 영덕 군수는 군대를 보내 진압해 줄 것을 청하였고, 경상북도관찰서리 대구 군수 김한정(金漢鼎)이 이 소식을 내부에 알리자, 내부에서는 곧 군부에 알려 군대를 파병할 테니 대구부에서도 진위대를 파병하도록 하라고 명하는 등 그야말로 난리였다. 이후 신돌석은 한동안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잠적하였다. 태백산 호랑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태백산맥을 종횡무진으로 넘나들며 활약한 것이다.

한동안 뜸했던 신돌석은 1906년 10월 영해를 다시 점령한 뒤 백암산과 일월산, 대둔산, 동대산 방면으로 이동하거나 병력을 분산하여 소규모 유격전을 펼쳐 나갔다. 이 무렵 신돌석의 고향 마을은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울진 지역에서 신돌석부대에 패한 진위영 병정들이 돌아가는 길에 "이곳이 신돌석의 집이다"라고 하면서 집 수십 채를 불태워버린 것이다. 1906년 11월 의진은 엄동설한을 맞으면서 추위를 피해 청송군 보현산(普賢山)으로 이동하던 중 청송 이전평에서 대구 진위대와 전투를 치르고 동대산(東大山)을 향해 북진하였다. 이 무렵 오른손 엄지손가락에 총상을 당하고도 동대산에서 또 전투를 치르고, 북상하여 청하(淸河)에서부터 영덕 조현(鳥峴)에 이르기까지 대구 진위대와 일본군의 계속적인 공격으로 여러 차례 전투를 치렀으나 의병들의 사기는 꺾이지 않았다.

[태백산맥 곳곳에 요새를 두고 싸우다]

1906년 초반 신돌석이 주로 등장한 지역은 영해 묘곡면(畝谷面) 대동(大洞)이었다. 이곳은 신돌석의진의 중요한 훈련장이자 요충지였으나 1906년 후반에는 다시 창수면 수동(水洞) 희암곡(喜庵谷)을 주둔지로 하였다. 신돌석은 혹한기를 넘기고 1907년 봄 이후 다시 활동을 강화하였다. 영해와 영덕을 중심으로 종횡무진하였다. 8월 이후 일본군을 공격하고 영양 관아를 불사르고 영덕의 일본인을 축출하는 등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1907년 8월 군대 해산 이후 해산당한 군인들이 의진에 참여함으로써 병사들의 사기와 의진의 기세가 더욱 높아진 때였다. 1907년 9월 15일 영양(英陽) 주곡(注谷)에서 일본군 1종대(縱隊)와 격전을 펼쳐 몰아내고 고을을 돌아보며 촌락을 안심시켰다.

1907년 10월 영해로 들어가 경무서를 격파한 뒤 수동으로 들어가 군량을 모으고 군사들을 휴식시켰다. 이 무렵 이인영(李麟榮)의진을 중심으로 연합의진이 서울로 진격하기 위하여 전국 의병장들이 경기도 양주(楊州)에 집결한다는 전달이 왔다. 1907년 11월 경기도 양주에 집결한 의병장들은 ‘13도창의대진소’를 결성하고 관동창의대장 이인영을 ‘13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신돌석은 교남창의대장(嶠南倡義大將)으로 천거되었다. 그렇지만 신돌석은 합류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신돌석이 유생의병장들 사이에서 신분이 미천하다 하여 교남창의대장에서 배제되었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1907년 겨울 이후에는 평해군 선미동(仙味洞) 온정곡, 백암산과 검마산의 정상 아래 자리잡은 항아리 속 같은 천혜의 요새 독곡(獨谷[독실])을 주둔지로 하였다. 이곳은 신돌석이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곳이었다. 13도창의군의 서울진공작전에 동참하지 않은 신돌석은 1908년 1월 의진을 소규모 부대로 나누어 영양군 수비면 장파(長坡) 골짜기에서 안동수비대의 공격을 받고 전투를 벌였다. 그 뒤 백암산과 검마산의 사이를 넘어 독곡으로 들어가 잠시 휴식을 취하려는 찰나 다시 일본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이 전투에서 60여 명의 병력을 잃는 등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가장 믿었던 요새가 급습을 받은 것이다.

일단 위기를 넘긴 태백산 호랑이 신돌석은 20~50명 정도의 소규모 부대로 영양과 울진을 넘나들며 추격하는 일본군을 따돌리고 사라지는 등 산악지대의 특성을 충분히 활용하는 작전을 펼쳤다. 1908년 2월이 되면서 평해군 일원에서, 오서면 수동에서 병력을 모집하고 평해군 선미동에서 군자금과 군량을 가져갔고, 원서면, 온정면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아갔다. 일본군이 일월산·백암산·검마산 등 산속을 헤매며 신돌석을 추적하고 있을 때, 신돌석은 평해까지 내려가 물자를 수집하고 사라졌던 것이다.

[생포작전과 회유작전에 맞서다]

일본군의 의병토벌대는 모두 6개종대로 편성하여 북쪽 봉화에서 남쪽 예안까지 남북으로 길게 그물을 친 뒤, 의병들을 동쪽 일월산으로 밀어 붙이는 작전으로 나왔다. 신돌석을 생포한다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도 아무 소득이 없었다. 신돌석은 이미 영해지역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일본군의 전면 공격을 물리친 의병들의 사기는 고조되어 있었다. 3월 들어 평해와 영해 지역을 중심으로 군자금과 병력 모집에 나섰다.

1908년 여름 병사들을 휴식시키고 7월에 활동을 재개하여 평해 한곡(寒谷)에서, 9월에는 영해 희암(喜巖)에서, 10월에는 봉화(奉花)를 거쳐 영양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신돌석은 일본군의 ‘생포작전’에도 잘 버티었으나 다시 회유전략에 직면하였다. 도장관(道長官)의 약속이 그렇고, 통감의 편지 등이 그러하였다. 이뿐 아니라 아내 한재여를 불러 극진히 대접하고 권유서(勸諭書)를 주어 보냈다. 신돌석은 아내를 크게 꾸짖고 권유서를 불태웠다.

[태백산 호랑이 숨을 거두다]

신돌석은 일제의 생포작전과 회유작전으로 압박을 받았지만 이에 흔들리지 않고 태백산맥 정상을 오르내리며 항전을 이어갔다. 1908년 겨울 혹독한 추위와 함께 의병투항자가 급격히 늘면서 더 이상 항전을 이어가기 어렵다고 판단한 신돌석은 부하들에게 해산을 권유하였다. 그 뒤 만주행을 결심하고 준비에 나섰으나 11월 19일[양력 12월 12일] 새벽 1시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영덕군 북면 눌곡[지품면 눌곡리] 황곡마을 골짜기에서 김상렬(金相烈) 형제들의 손에 암살되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 뒤 아버지 신석주와 아우 신태범이 신돌석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활약하다가 신태범은 오히려 연루자가 되어 수개월 투옥되었다. 살해범은 김상렬·김상태(金相泰)·김상호(金相浩) 3형제였다. 이들은 신돌석의 할아버지의 외가 또는 어머니의 외가 쪽으로 6촌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살해한 이유는 ‘붙어 있는 현상금’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일본경찰은 시신을 확인한 뒤 가족에게 인도하였지만, 장례도 일본군의 개입으로 ‘의장의 집 남동향에 장사’하였다. 태백산호랑이 신돌석은 기병한 지 2년 8개월 만에 출발지로 돌아온 셈이다. 묘지는 1971년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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