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의 정맥을 계승한 영해의 산림, 갈암 이현일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1320
한자 退溪-正脈-繼承-寧海-山林葛庵李玄逸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재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갈암종택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6길 12-23[인량리 412-2]지도보기

[정의]

퇴계의 정맥을 계승한 경상북도 영덕군의 학자 이현일의 이야기.

[나랏골에서 태어나다]

이현일(李玄逸)[1627~1704]은 경상도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 인량리(仁良里)[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나랏골 본가에서 태어났다. 이현일의 본관은 재령이씨(載寧李氏)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1590~1674]의 7남 3녀 중 3남이다. 재령이씨 영해파(寧海派)는 이현일의 고조부인 이애(李璦) 때 처음 영해 인량리에 입향하였다. 이애는 중부(仲父)인 이중현(李仲賢)이 1497년에 영해 부사(寧海府使)로 부임하자 이중현을 따라 영해로 왔다. 그때 지역의 명문가인 진성백씨(眞城白氏) 백원정(白元貞)의 딸과 혼인하면서 영해 지역에 정착하였고, 그 후손들이 이후 영해·영덕·안동·청송·영양 일대에 세거하게 된다.

이애의 손자이자 이현일의 조부인 운악(雲嶽) 이함(李涵)[1554~1632] 대부터 재령이씨 영해파는 크게 번성하였다. 이함은 평해의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 안동의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등에게 종유(從遊)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량미를 조달하는 데 힘썼다. 56세 때에는 문과에 급제하였다. 영해 인량리에는 종가와 별당인 충효당(忠孝堂)을 지었는데, 충효당은 지금도 재령이씨 영해파의 대종가로 내려오고 있다. 이함은 이시청(李時晴)·이시형(李時亨)·이시명·이시성(李時成) 등 네 아들을 두었다. 이들의 후손이 각각 청계공파, 우계공파, 석계공파, 호군공파 등으로 분파되었다. 이현일의 아버지인 이시명은 이함의 셋째이다.

이시명은 근시재(近始齋) 김해(金垓)[1555~1593]의 딸과 혼인하여 1남 1녀를 두었고, 그녀가 별세하자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1564~1633]의 딸 장계향(張桂香)과 혼인하여 6남 2녀를 두었다. 김해는 예안 오천리(烏川里)의 광산김씨(光山金氏)이다. 이시명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고제인 조목(趙穆)·김성일·류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당시 창의하여 안동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당시 오천의 광산김씨를 비롯한 예안의 유림(儒林)들은 퇴계의 고제 중에서도 조목의 학맥을 계승하고 있었다.

장흥효는 안동 금계 출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장흥효는 근처에 사는 김성일을 비롯하여 류성룡·정구 등 퇴계의 고제들을 두루 수학하며 학문을 익혔다. 이처럼 본가와 외가의 학문적 배경은 이현일이 퇴계학맥을 이어가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어머니 장계향은 이현일을 임신하였을 때 특이한 꿈을 꾸었는데, 과연 태어난 후에도 특이한 자질이 있었다고 한다. 6세 때 아버지 곁에 있다가 갑자기 사람의 두 눈썹이 곤괘(坤掛)의 형상과 비슷하다고 말하였다는 일화가 전한다. 7세 때부터 학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9세 때 「영화왕(詠花王)」이라는 시를 지었다. 사람들이 시를 보고 훗날 왕을 잘 보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하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화왕발춘풍(花王發春風)[꽃의 왕이 봄바람에 피어]/ 불어계단상(不語階壇上)[계단 위에서 말이 없구나]/ 분분백화개(紛紛百花開)[많고 많게 핀 온갖 꽃들]/ 하화위승상(何花爲丞相)[어느 꽃이 승상이 될까]

[퇴계 학맥을 잇다]

아버지 이시명은 장계향과 결혼한 이후 장인인 장흥효에게서 학문을 수학하였다. 이현일의 형인 정묵재(靜默齋) 이상일(李尙逸)[1611~1678], 존재(存齋) 이휘일(李徽逸)[1619~1672]도 이때 함께 수학하였다. 장흥효는 이현일이 7세 때 세상을 떠나지만, 장흥효의 학문은 가족을 통해 그대로 이현일에게 전수되었다. 어머니 장계향 또한 ‘여성군자(女性君子)’로 이름난 인물로,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의 저자이다. 이렇게 이현일은 가족들을 통해 퇴계의 고제인 김성일·류성룡·정구의 학문을 두루 익힌 장흥효의 학문을 이어받았고, 또 외가인 광산김씨를 통해 조목과도 연결되었다. 가학(家學)을 통해서 퇴계 학맥으로 연결된 것이다.

이현일은 12세 때 『소학』, 『논어』 등을 읽었다. 14세 때는 영해의 석보(石保)[지금의 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로 거처를 옮긴 아버지 따라가서, 손오병법(孫吳兵法) 등의 병서(兵書)를 읽었다. 이때 병서를 읽은 것은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으려는 목적이었지만, 이내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내면의 공부에 착수하였다. 18세 때에는 경력(經歷) 박륵(朴玏)의 딸과 혼인하였다. 박륵은 무안박씨(務安朴氏)로 임진왜란 때 경주 탈환의 공을 세운 무의공(武毅公) 박의장(朴毅長)의 아들이었다.

이현일은 20세인 1646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런데 이 과거의 시제(試題)가 ‘눈물을 흘리며 옛 임금과 이별하다[流涕別舊君]’였는데, 이것이 시휘(時諱)에 걸려서 시험관들이 파직당하고 합격자들의 합격이 모두 취소되었다. 이 때문에 이현일의 합격도 취소되었다. 22세 때 다시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복시(覆試)에서 떨어지자 이후에는 과거 공부에 마음을 두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이현일은 영천(榮川)[현재의 영주]의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를 찾아갔다. 김응조는 류성룡과 장현광(張顯光)의 제자이다. 이듬해에는 형인 이휘일과 산방(山房)에서 독서하였다. 이휘일이현일의 평생에 스승이자 학문적 동지였다. 26세 때는 이휘일과 함께 영양 석보의 석계초당(石溪草堂)에서 학문을 익히면서 『홍범연의(洪範衍義)』 편찬을 논의하였다.

과거를 그만 둔 이후 이현일은 대략 40세가 될 때까지 영해 석보나 수비에 거처하는 아버지를 모시며 이휘일과 함께 학문을 익혔다. 석보보다 더욱 깊숙한 곳에 있는 수비에 거주할 때 자호를 지어서 ‘갈암(葛庵)’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때로는 은거하며 형제들과 독서하고, 때로는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과 예안의 도산서원(陶山書院) 등을 방문하여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40세가 되자 어느덧 이현일은 영남의 거유(巨儒)로 성장해 있었다.

[영남 남인의 대표가 되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고 현종이 즉위하자 인조 왕비인 자의대비(慈懿大妃)가 입는 상복 기간이 문제가 되었다. 당시 송시열(宋時烈)을 위시한 서인은 효종을 서자(庶子)로 보아 1년복을 주장하였고, 윤휴(尹鑴)·허목(許穆) 등 남인은 효종을 적장자(嫡長子)로 보아 3년복을 주장하였다. 이것이 1차 예송 논쟁으로 효종 승하 당시에는 송시열의 설이 채택되었다.

1666년 영남남인들은 이 결정을 그대로 둘 수 없다며, 1,700명이 연명한 상소를 올리게 된다. 이 상소는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가 주도하였다. 이때 이현일도 송시열의 ‘체이부정(體而不正)[소생이기는 하지만 적자가 아님]’설을 반박하는 복제소(服制疏)를 지었다. 최종적으로는 류성룡의 손자 류원지(柳原之)의 소본(疏本)이 채택되어 류세철(柳世哲)을 소두(疏頭)로 하는 유소가 올려졌다. 이 상소가 현종에 의해 거절당함으로써 1차 예송은 송시열의 설이 완전히 채택되었다. 이현일은 그의 소본(疏本) 채택되지 못하여 임금에게 올려 지지 않았지만, 영남 유림들 사이에서 이름을 크게 떨치는 계기가 되었다.

이현일은 41세 때 홍여하, 금옹(錦翁) 김학배(金學培)와 함께 장현광을 제향한 경광서원(鏡光書院)에서 강론하였고, 42세 때에는 부친의 명으로 과거를 치러 서울에 갔다가 포천의 용주(龍洲) 조경(趙絅)을 방문하였다. 하지만 40대 후반의 이현일에은 큰 시련을 겪게 된다. 1672년에 평생의 학문적 동지인 중형 이휘일이 별세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김학배, 또 그 이듬해에는 부친 이시명이 세상을 떠났다. 홍여하도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1674년 현종이 사망하고 숙종이 즉위하였고, 이어 벌어진 2차 예송 논쟁에서 숙종이 송시열의 설을 배척하면서 환국이 일어나 남인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이때 이현일은 암행어사의 추천으로 영릉 참봉(寧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곧 부친상을 당하여 나가지 않았고, 1676년 다시 사직서 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상기가 끝나지 않아 출사하지 않았다. 이듬해 51세의 이현일은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에 제수되자 마침내 조정에 나갔고, 곧 공조 좌랑(工曹佐郞)이 되었다. 이때 허목이 이현일이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으니 경연(經筵)에 참여시키자고 건의하였지만, 임금을 뵙지 못하고 어머니의 병환으로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후에 공조 정랑(工曹正郎),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등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지만 조정에 오래 있지 않았다.

1680년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나 정권이 남인에서 서인으로 교체되었다. 게다가 1680년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이때부터 한동안 이현일은 고향에 은거하게 되었다. 하지만 영남남인의 대표로는 입지가 더욱 강화되었다. 이현일은 1686년에 이휘일과 함께 저술을 시작하여 이휘일의 사후에도 계속 작업을 진행한 『홍범연의』의 초고를 마침내 완성하였다. 1688년에는 「율곡사단칠정변(栗谷四端七情書辨)」을 지어 퇴계학파의 입장에서 율곡(栗谷) 이이(李珥) 이기설(理氣說)을 비판하였다. 17세기 초반 영남의 퇴계학파를 대표했던 장현광·정경세(鄭經世) 등은 퇴계의 학문을 계승하면서 이이의 학문을 일부 수용하는 견해를 보였다. 하지만 예송 논쟁 등으로 서·남인 간의 갈등이 격화되는 가운데 이현일은 율곡의 학설을 비판하고 다시 퇴계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재천명하였다. 이는 곧 퇴계학파의 결집으로 이어졌으며, 이후 이현일의 후학들에 의해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리고 바로 이듬해 기사환국이 일어난다.

[산림으로 출사하다]

숙종의 정비인 인현왕후(仁顯王后)에게 자식이 없는 가운데, 희빈(禧嬪) 장씨(張氏)가 1688년에 아들을 낳았다. 숙종은 이 아들을 원자(元子)로 삼고 싶었는데,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노론은 이를 반대하였다. 이듬해 숙종은 반대를 무릅쓰고 원자 책봉을 강행하였고, 서인을 실각시키고 남인으로 정권을 교체하였으며, 인현왕후를 폐비하고 희빈 장씨를 왕후로 삼았다. 이것이 기사환국이다.

숙종 초기 남인 정권은 탁남(濁南)과 반송시열파인 서인 외척 세력의 연합 정권이었다. 기존 정권의 실패 원인 중 하나가 남인 세력의 완전한 통합에 실패한 것이라 판단한 기호남인은 영남남인 세력을 출사시키려고 하였고, 그래서 영남남인을 대표자를 산림(山林)으로 등용하여 우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래서 산림으로 조정에 출사한 영남남인의 대표가 바로 이현일이었다.

1689년 성균관 사업(成均館司業)을 시작으로 이현일은 사헌부 장령·공조 참의·이조 참의·성균관 ·대사헌·이조 참판·병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또 경연에 참여하고 세자의 스승이 되기도 하였다. 1693년 이현일은 이조판서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산림으로서의 이현일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정권 실세들은 이현일을 국왕을 보도(輔導)하는 역할에만 두려고 하였다. 이것은 『홍범연의』를 편찬하는 등 경세(經世)에 포부를 품은 이현일의 기대에는 못 미치는 것이었다. 이현일은 경연에 참여하여 국왕을 성학(聖學)으로 이끄는 데에 역할을 하기는 하였지만 세상을 개혁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하였다.

오히려 당시 남인의 정치적 문제를 해결하는 창구로서의 일만 하였다. 이현일은 경신환국 당시 피화를 입었던 남인들을 신원하고, 인현왕후의 숙부였던 민정중(閔鼎重)을 척리로 규탄하였다. 또 숙종의 왕자들이 태어나자 적서(嫡庶)를 분명히 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분명 집권 남인의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고 명분을 강화시키는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이현일은 이 과정에서 노론의 원한을 사게 되고 산림으로 대우받지만 시행한 것은 별 볼일 없다는 등 근기남인 유생들의 비난을 받게 된다. 영남의 대표로 출사했지만 입지가 좁았던 이현일을 조정에서 별다른 일을 해낼 수 없었다. 이현일의 잦은 사직과 귀향은 저간의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에는 이조판서에까지 오르기 하였으나 곧 정권이 교체되어 남인이 실각하였다.

[수천리 유배 길을 떠나다]

1694년에 대신인 민암(閔黯), 훈련대장인 이의징(李義徵) 등이 인현왕후 민씨의 복위를 도모하는 서인 세력을 역모로 처벌하려다 도리어 자신들이 숙종으로부터 국문을 당하게 된다. 이 때문에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이 교체되니 이것이 갑술환국이다.

갑술환국으로 남인들이 대거 처벌받는 가운데 이현일도 인현왕후를 모욕한 혐의로 국문을 받는 조사기(趙嗣基)를 구원하였다는 혐의로 국문을 받았다. 이어 함경도 홍원(洪原)으로 유배되니 이때가 1694년 4월이다. 그런데 유배지에 도착하여 지내던 7월에 이번에는 인현왕후를 모해(謀害)하였다는 혐의로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게 되었다. 이 사건의 원인은 인현왕후가 폐위된 16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재이가 일어나자 이현일은 응지소를 올렸는데 그것이 「인재이언사소(因災異言事疏)」이다. 이 상소에는 인현왕후가 “왕비의 도리를 지키지 않아서 스스로 하늘을 끊었지만[不循壼彝。自絶于天] …… 방위를 설치하여 규찰하고 단속하는 것을 엄하게 해야 합니다[爲設防衛。謹其糾禁]”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현일의 의도는 인현왕후가 비록 숙종에게 쫓겨나기는 했지만 보호하고 잘 대해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서인은 이것을 인현왕후가 윤리를 어긴 사람이며 가두어두고 감시해야 한다는 뜻으로 곡해하였다. 이 때문에 이현일은 국모를 핍박한 자가 되어 남인의 실세였던 민암·권대운(權大運)·목내선(睦來善) 등과 함께 ‘명의죄인(名義罪人)[명분과 의리를 저버린 죄인]’, ‘강상죄인(綱常罪人)[윤리에 어긋나는 죄를 지인 죄인]’, ‘기사년의 여당’으로 낙인찍혔다.

국문의 결과 홍원보다 먼 함경도 종성(鍾城)에 위리안치되었다. 극형을 당한 것에 비하면 다행이기는 하였지만 68세의 고령에 수 천 리 떨어진 곳에 유배를 가는 것만으로도 극형과 비슷한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다행히 사형을 면한 것은 환국 직후 성립된 정권에 소론이 중심적으로 기용되었기 때문이다. 소론은 남인이 완전히 처벌받는 것에 반대하는 온건한 입장을 취하였고, 이현일의 경우 남구만(南九萬)이 사형을 반대하는 동정론을 폄으로써 극형을 면하게 되었다.

종성으로 유배된 지 3년 뒤인 1697년 위리가 철거되고 5월에 유배지가 그나마 고향과 가까운 전라도 광양(光陽)으로 변경되었다. 이어서 1698년에는 섬진강 변의 갈은리(葛隱里)로 거처가 옮겨졌다. 광양으로 옮겨온 뒤부터는 보다 독서에 열중하고 제자를 기를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1699년에는 유배를 풀고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자 노론 측이 상소를 유배에서 풀려나는 것을 계속 반대하여, 이현일은 진주(晉州)로 가서 계속 조정의 명령을 기다렸다. 1700년 2월이 되어서야 최종적으로 유배가 완전히 끝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에 이현일은 안동 임하의 금소(琴韶)에 거처를 정한 뒤 5월에 영해로 돌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기르다]

이현일은 유배에서는 풀려났으나 죄적(罪籍)[죄인의 명부]에서는 풀려나지 못하여 관작(官爵)이 회복되지 못하였다. 즉 아직 죄인의 상태로 있는 것이었다. 유배에서 풀려난 이듬해 숙종은 죄적에서 풀어주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노론 측 대간의 반대로 곧바로 취소되었다. 이후 살아 있을 동안에는 죄적에서 풀리지 못하였다. 사실 노론 측은 조선왕조가 끝나갈 때까지 이현일이 죄적에서 풀려나는 것을 반대하였다.

이현일은 말년에 영해와 안동의 금소[현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를 오가며 후학들을 양성하였다. 더 이상 관직에 나갈 수 없고 죄인인 상태로 있었으나 오히려 이현일에게 학문을 배우려는 사람들은 광양으로 유배된 이후부터 영해, 안동에 머무는 동안 더욱 많이 찾아왔다. 따라서 이현일의 제자들을 기록한 『금양급문록(錦陽及門錄)』에는 350명이 넘는 사람들이 수록될 수 있었다. 여기서 금양(錦陽)이 바로 금소를 가리키는 말이며, 현재도 이현일이 강학한 금양강도지(錦陽講道址)가 전해진다. 고향으로 돌아온 지 4년 뒤인 1704년에 78세의 이현일은 금소의 우사(寓舍)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현일은 조정에서는 비록 실패하였지만 영남의 퇴계학파를 통합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이현일은 가학적 연원을 통해 퇴계의 고제들의 학문을 두루 익힐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17세기 초중반 영남의 퇴계 학맥은 크게 월천계, 학봉계, ‘서애-우복[정경세]계’, ‘한강-여헌[장현광]계’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런데 이중 예안을 중심으로 한 월천계는 인조반정 이후 크게 꺾인 상태였으며, 학봉계는 입지가 크지 않은 상황이었다. 따라서 퇴계학맥은 정경세와 장현광의 문인들이 주도하는 상황이었으며, 퇴계의 학문을 계승하면서 이이의 학설을 일부 수용하는 융합적 성향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중반 이후 예송논쟁이 벌어지면서 서인·남인 간의 갈등이 격화되었고, 이것은 학문적 경향에도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이때 이이의 학설을 비판하면서 영남의 남인들을 크게 규합시킨 인물이 이현일이다. 이현일은 학문적 연원을 바탕으로 학봉계를 정립시키고 월천계를 통합하였다. 이어서 산림으로 조정에 불려가면서 퇴계학맥 전체를 포괄하였고, 유배 이후 영남우도 지역을 거치면서 그곳의 학자들을 규합하여 인조반정 이후 몰락한 남명학맥도 규합하였다. 즉 말년의 이현일은 영남에 있었던 다양한 통맥을 규합하여 이른바 ‘영남학파’가 성립시켰다. 정치적, 학문적으로 다른 붕당과 구별되는 ‘영남남인’의 모습은 이현일의 의해서 등장하였다. 여기에 더하여 이현일은 김성일을 퇴계의 정맥으로 규정하였다. 이현일의 형 이휘일은 자신의 스승 장흥효를 '퇴계-김성일'로 이어지는 학문을 이어받았다고 표현하였다. 이어서 이현일이휘일을 통해 장흥효의 학문을 계승함으로써 '퇴계-김성일-장흥효-이현일'로 이어지는 계보를 구성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이현일의 후학인 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 등에게 그대로 계승되었고, 18세기 이후에는 영남학파의 주류가 되었다.

[세상을 떠난 후에도 죄명은 끝나지 않다]

이현일의 학맥은 이현일 사후에 영남남인의 주류가 되었다. 그리나 기호남인과 함께 남인의 중요한 축인 영남남인의 경우 정작 그들의 스승인 이현일이 여전히 죄인인 상태였다. 그리고 이현일이 죄인이고 영남의 남인들이 이현일의 후학인 이상 ‘명의죄인’의 제자인 그들의 출사는 정치적으로 매우 제한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모순을 풀고 이현일의 죄명을 씻기 위해 이현일의 후손과 제자들은 이현일의 신원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신원 운동은 무려 200년 동안 진행되었다. 노론의 방해와 남인의 간절함이 빚어낸 결과였다.

이현일 사후인 1710년에 숙종은 이현일의 죄를 씻어주었다. 1711년에는 관작도 회복시켜 주었으나, 노론 측이 강력히 반대하자 모두 취소되어 버렸다. 이후 숙종 연간에는 다시 관작이 회복되지 못하였다. 다만 제자들은 이현일이 아직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1718년에 이휘일이 제향되어 있는 영해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이현일을 제향하였다.

숙종이 승하하고 경종이 즉위하자 이현일의 문인들은 본격적으로 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1721년에 영해와 안동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이현일의 신원을 위한 유소(儒疏)를 올렸다. 그런데 이 상소는 노론 측의 방해로 임금에게 올려지지도 못하였다. 1722년 신임옥사가 일어나 노론에서 소론으로 정권이 바뀌었다. 남인에게 보다 우호적인 소론 정권이 등장하자 이현일의 문인들은 다시 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번에도 역시 영해와 안동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었지만 영남 전체의 문인들을 규합하여 1,000여 명이 연명한 대규모 유소를 올렸다. 그러나 소론 측마저 이 상소를 저지하여 또다시 임금에게 올려보지도 못하고 실패하였다. 소론이 남인에게 우호적이긴 했지만, 이현일을 ‘명의죄인’에서 풀어주는 것은 동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경종 대에 큰 좌절을 겪었지만, 영조 연간에는 더 큰 시련이 닥쳐왔다. 무신란 이후 일부 남인이 조정에 출사하였는데, 그중에서 이현일의 제자인 김성탁(金聖鐸)이 1737년에 모욕을 받은 스승을 변호하다가 스승과 같은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이 사건으로 여파로 영해의 인산서원이 이현일의 서원으로 지목되어 훼철될 위기에 처하였다. 영해의 유림들은 이현일의 위패를 우선 철향(撤享)하고 서원을 이건하는 것으로 위기를 넘기려 했지만, 인산서원은 1741년에 완전히 훼철되었다.

영조 대 중반이후 탕평파 중 노론의 힘이 점차 강화되자 제자들은 이현일 신원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게 되었다. 이때는 이미 이현일의 직전제자들은 세상을 떠난 뒤이고, 재전제자들이 중심이 되었다. 우선은 인산서원을 복구하려고 영해에 서원 건립을 시도하였으나, 1750년대와 1770년대에 있었던 인산서원의 건립 시도는 다시 좌절되었다. 정조가 즉위하자 이현일의 증손인 이중조(李重祖)가 격쟁을 통해 임금에게 직접 이현일의 신원을 호소하였으나 이 또한 실패하였다.

이현일 사후 100년이 지나도록 신원이 실패하였지만 후손과 제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현일의 후손과 제자들은 이미 정리가 되었지만 판각되지 못한 이현일의 문집을 신원과 관계없이 우선 간행하려고 하였다. 1810년 영해에서 후손인 이광진(李光振), 이상채(李相采)가 주도하여 『갈암집(葛庵集)』 간행에 성공하였지만, 문집 간행이 관에 보고되어 경상감사가 개입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결국 문집 간행의 주도자들을 유배에 처해졌고, 문집은 모두 수거되어 훼판되었다. 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후학들은 이현일의 신원을 계속 추진하였다. 결국 철종 연간인 1852년에 다시 유소가 올려졌고, 마침내 관작을 회복하라는 명령을 임금으로부터 받을 수 있었다. 사후 150여년 만에 복권된 것이다. 이에 이현일로부터 이재-이상정을 거쳐 학통을 계승한 류치명(柳致明) 1855년에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 이어서 고종 연간인 1871년에는 ‘문경(文敬)’으로 시호가 내려졌다.

그러나 불과 2년 뒤인 1873년에 노론계의 상소로 시호가 취소되고 관직이 환수되었다. 이현일의 관작을 환수하라는 상소를 올린 사람은 최익현(崔益鉉)이었다. 200년 전에 받았던 혐의가 이때까지도 계속 이어져 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무렵은 외세의 침입이 본격화되는 시점이었다. 위기가 격화되는 19세기 말 이현일의 제자들은 척사운동과 의병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현일 제자들의 구국을 위한 활동과는 관계없이 이현일은 신원되지 못하였다.

모든 죄명이 사라지고 관작이 완전히 회복되는 것은 순종 연간인 1908년이었다. 이때 조선 정부는 망국 직전에 있었고, 유림에 대한 일종의 유화책으로 많은 이들을 죄명에서 풀어주었다. 대표적으로는 인조반정 이후 계속 역적 취급을 받았던 내암(萊庵) 정인홍(鄭仁弘)이 이때 신원되었다. 또 갑술환국 당시 이현일과 함께 피화를 당했던 목내선과 이후 탕평 정국에서 죄인이 되었던 이광좌(李光佐), 조태구(趙泰耈) 등도 함께 신원되었다. 즉 이현일은 조선이 망할 때가 되어서야 조정으로부터 용서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현일과 그의 제자들의 활동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었다. 이현일을 영남학파를 집결시켰고, 이현일의 제자들은 영남남인의 주류로 계속 이어져 조정에서의 소외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들의 학문을 수양하며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 이러한 수양과 태도가 한말의 척사운동·의병운동, 이후의 독립운동으로 면면히 이어지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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