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백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875
한자 李柏伊
영어공식명칭 Lee Baegi
이칭/별칭 이백이(李栢伊),이송이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5년 3월 1일연표보기 - 이백이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20년 10월 - 이백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지원 군자금 모집 활동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66년 1월 4일연표보기 - 이백이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이백이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천리 194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이백이는 1895년 3월 1일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천리 194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이백이(李栢伊)·이송이(李松伊)를 사용하였다.

[활동 사항]

1920년 10월 중순 무렵부터 이백이박성운(朴聖雲)·김덕문(金德文)·김기학(金奇鶴) 등과 함께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에 소재한 등운산(騰雲山) 일대에서 모임을 가졌다. 표면상으로는 묘지의 관상, 병의 치료 등을 내세웠지만, 실재로는 독립운동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때 울진 출신의 전기학(全奇鶴)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하여 독립자금 모집 활동을 펼칠 동지를 규합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이백이 등도 가담하였다. 이백이 등은 영덕을 중심으로 각지 재력가들로부터 의연금을 모으기로 결의하였다. 우선 거사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기 위하여, 창수면에서 대장간을 운영하는 김병재(金炳載)와 영양군 수비면의 송모(宋某)의 도움을 받아 칼과 모형 폭탄을 마련하였다.

이백이는 1920년 12월 19일 박성운·전기학과 함께 인량동(仁良洞) 신세희(申世熙)를 방문하여 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군자금 4,000원을 요구하였으나, 소지금(所持金)이 없어 200원만 수령하였다. 이어 인량동의 김상락(金相洛)을 방문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2월 21일에는 영해면 원구동 박세찬(朴世燦)을 방문하여 소액의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이어서 같은 마을의 남붕진(南鵬鎭)을 방문하여 군자금 2,000원을 요구하였으나 소지한 돈이 없어 31일까지 제공하겠다는 확약서를 받았다. 그 외 울진군 등지에서 수차에 걸쳐 군자금을 수합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다.

1921년에도 군자금 모집을 계속하여, 1921년 1월 16일 창수면 삼계동의 문병구(文柄龜)로부터 120원을 모집하였고, 창수면 인량동의 김상락을 다시 찾아가 군자금을 요구하였다. 2월 6일 다시 인량동의 신세희와 김상락을 방문하여 군자금을 모금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백이 등의 활동을 파악한 일제 경찰에 발각되었고, 신세희의 집에서 격투를 벌였으나 끝내 체포되고 말았다. 3월 3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제령(制令) 제7호 위반 및 강도죄로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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