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822
한자 金演淳
영어공식명칭 Kim Yeonsun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1년 11월 11일연표보기 - 김연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김연순 창수면 3.1독립운동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46년 10월 2일연표보기 - 김연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3년연표보기 - 김연순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김연순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창수면 3.1독립운동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리 124 지도보기
활동지 창수경찰관주재소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창수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강점기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김연순은 1881년 11월 11일에 태어났으며, 거주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신리동 124이다.

[활동 사항]

1919년 3월 18일 오후 1시경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동 시장에서 정규하(丁奎河)·박의락(朴義洛)·권상호(權相鎬) 등이 주도하여 영해면 3.1독립운동을 일으켰다. 3.1운동 소식이 전해져 다음날인 3월 19일 영양의 이종구(李鍾龜)가 수십 명의 창수면 오촌동·삼계동 주민들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참가하고자 영해로 출발하였다. 길상동·신리동 주민들도 합세하기 위해 영해로 향하였다. 마을 주민들이 신기동에 이르렀을 때 이미 신기동 주민들은 영해로 출발한 후였다. 군중들은 논의 끝에 시간상 영해로 가는 것은 어렵다고 보고, 창수동에서 독립만세를 외치자고 합의하였다. 신리동에서는 구장 이현설(李鉉卨)이 주민들의 참여를 권유하였다. 이에 김연순을 비롯해 김도치(金道致)·정재주(鄭在珠)·오해봉(吳海鳳) 등이 동참하였다. 3월 18일 영해면 3.1독립운동 상황을 통보받은 창수경찰관주재소 순사와 순사보들은 자신의 물건을 인근 주민들 집에 미리 보관시키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3월 19일 오후 4시경 창수경찰관주재소 부근에 약 200명의 군중들이 결집하면서 창수면 3.1독립운동이 시작되었다. 군중들은 몽둥이를 휴대하거나 태극기를 흔들며 주재소로 행진하였다. 이현설·이현우·권재형 등이 선두에서 군중들을 이끌었고, 김재수(金在守)·권덕명(權德明) 등은 대형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또한 주재소를 파괴하라고 소리쳤다. 김연순김도치·김대지·김경발·황부칠(黃夫七)·이석범(李錫範) 등과 함께 주재소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군중들이 주재소를 파괴하고 사무실로 들어가 일경의 대검을 빼앗으려고 하자, 순사와 순사보들은 도주하였다. 그러자 이현설·이수각 등의 지휘 하에 군중들은 주재소 건물, 시설물 등을 부수고 서류·장부·공문서· 서적 등을 찢거나 사무실 밖으로 내던져 파기하였다. 또한 총 3정과 대검 2개도 파손시켰다. 이어 숙소 담, 굴뚝, 기둥, 벽 등을 망가뜨렸다. 실내로 들어가 목욕장과 목욕장 솥을 부수고 의류·가구·이불·식기 등을 꺼내 파손시켰다. 김연순은 이때 정재주·오해봉·김덕규(金德圭)·정학수(鄭學壽) 등과 함께 주재소 벽을 무너뜨렸다. 오후 7시경 군중들은 독립만세를 외친 후 개사(改詞)한 노래를 부르며 귀가하려고 창수교까지 갔다가 일경들이 소유물을 사전에 보관해 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약 30명의 군중들은 뒤돌아가 오용이(吳龍伊)·박석문(朴石文)·이강복(李康福) 집에서 일경들의 물건을 찾아 파손시켰다.

창수면 3.1독립운동이 끝난 후 일경이 관련자를 대대적으로 체포하였는데, 김연순을 비롯해 신리동 주민들이 상당수 체포되었다. 김연순은 5월 2일 대구지방법원 경주지청에서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 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상훈과 추모]

198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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