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780
한자 朴羲洛
영어공식명칭 Park Huirak
이칭/별칭 응인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2년 11월 14일연표보기 - 박희락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박희락 영해면 3.1독립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박희락 병곡면 3.1독립운동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67년 1월 16일연표보기 - 박희락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8년연표보기 - 박희락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1년연표보기 - 박희락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영해면 3.1독립운동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8일 - 병곡면 3.1독립운동
출생지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원황리 지도보기
활동지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원황교회 목사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박희락(朴羲洛)[1882~1967]의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응인(應人)이다. 1882년 11월 14일 경상북도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에서 박종규(朴鍾逵)의 아들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박희락은 일찍이 한학을 공부하였다. 1916년 기독교에 입교하여, 병곡면 송천리 송천교회(松川敎會)의 장로를 지냈다. 이어 병곡면 원황리에 원황교회를 설립하였다. 1919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확산되자, 지역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영덕 지역의 만세시위운동은 1919년 3월 12일 평양신학교 입학을 위해 서울까지 갔다가 독립만세운동을 목격하고 돌아온 지품면 낙평리 예수교 장로교회 조사 김세영(金世榮)의 권유에 따라 계획되었다. 김세영의 권유를 받은 기독교도 권태원(權泰源)·정규하(丁奎河)·남효직(南孝直)·남여명(南汝明) 등은 기독교 신자들을 규합하는 한편, 영덕 지역의 토착 향반(鄕班)인 권(權)·남(南)·백(白)·이(李)·박(朴) 등 5성 양반을 설득하였다.

1919년 3월 18일 오후 1시 영해면 3.1독립운동이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 장터에서 시작되었다. 박희락도 시위에 참여하여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시위를 선도하였다. 박희락은 만세시위운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영해주재소 주임순사 스즈키[鈴木鶴次郞]의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일본인 순사와 조선인 순사보 등을 구타하였다. 또한 일본인 순사와 조선인 순사보, 영해공립보통학교 훈도 배병렬(裵秉烈) 및 생도들에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게 하였다. 나아가 시위 군중을 선도하여 영해주재소·영해공립보통학교·영해면사무소·영해우편소 등의 건물과 집기, 각종 서류를 파괴하였다. 뿐만 아니라 영해경찰서 서장 시게요시손[茂義孫]을 비롯해 순사 및 순사보 4명을 폭행하였으며, 본서로 돌아가는 이들을 추격하여 폭행하였다.

3월 18일 오후 2시경 박희락은 약 200명의 시위 군중을 이끌고 병곡면 병곡리로 향하였다. 그리고 병곡면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병곡면 3.1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이튿날 오전 11시경 영덕경찰서의 응원 요청을 받은 포항헌병대 분대장이 헌병 6명을 이끌고 영해에 도착하였다. 오후 5시경에는 대구 주둔 보병 80연대 소속 장교 이하 17명이 합류하였다. 그리고 일제 군경은 실탄을 발포하며 시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제1차 검거에서 박희락은 소요, 공무 집행 방해, 건조물 및 기물 손괴, 공문서 훼기, 상해 및 보안법 위반 등으로 기소되었다.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고 공소하였지만,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출옥 후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신앙 생활을 이어 나갔다. 1967년 1월 16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8년 대통령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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