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767
한자 申光烈
영어공식명칭 Shin Kwangyeol
이칭/별칭 비승(丕承)
분야 종교/유교,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효자·열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수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58년연표보기 - 신광열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89년 - 신광열 격쟁
몰년 시기/일시 1730년연표보기 - 신광열 사망
묘소|단소 박시동 -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하저리 지도보기
성격 효자
성별
본관 평산[영해]

[정의]

조선 후기 영덕 출신의 효자.

[개설]

신광열(申光烈)[1658~1730]은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의 원한을 풀고자 1689년(숙종 15) 도성으로 올라가 격쟁(擊錚)하였다.

[가계]

신광열의 본관은 평산(平山)[영해(寧海)], 자는 비승(丕承)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장수도찰방(長水道察訪)을 지낸 신지립(申智立), 할아버지는 신진(申稹), 아버지는 신두경(申斗慶), 어머니는 부사(府使)를 지낸 오경직(吳敬直)의 딸 낙안오씨(樂安吳氏)와 이상효(李尙孝)의 딸 영천이씨(永川李氏), 부인은 이석로(李錫老)의 딸 영천이씨(永川李氏)이다.

[활동 사항]

신광열은 1689년 11월 10일 역노(驛奴) 만년금(萬年金)과 함께 한양으로 상경한 후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敦化門)으로 들어와 입구인 차비문(差備門) 밖에서 격쟁하였다. 이에 앞서 1688년 영덕현령(盈德縣令)으로 부임한 이지걸(李志傑)이 은점(銀店)에게 뇌물을 받고, 이들이 신광열의 고조·증조·조부의 묘소까지 파고드는 데도 저지하지 않고 묵인하였다. 이에 아버지 신두경과 숙부 신두병(申斗柄)이 부당함을 호소하였으나, 가혹한 형벌로 인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에 신광열은 아직 혼인하지 않은 사촌누이와 함께 억울함을 풀고자 격쟁하였다.

이지걸은 곧 의금부에 나포되었고, 좌의정 목내선(睦來善)이 상주하여 남형한 죄목으로 곤양(昆陽)으로 귀양 보냈다. 이지걸은 곤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시신을 실은 배가 바다 위로 뜨자, 큰 파도가 덮쳐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당시 경향(京鄕)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듣고 신광열의 효성 때문이라 했으며, 『효랑전(孝娘傳)』을 지어 신광열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실제 이지걸은 사면 받은 후 관직 생활을 이어 나갔다.

신광열은 수직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관직은 부호군(副護軍)에 이르렀다.

[묘소]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하저리 박시동(博施洞)에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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