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735
한자 李玄逸
영어공식명칭 Lee Hyoenil
이칭/별칭 익승(翼升),갈암(葛庵)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재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27년연표보기 - 이현일 출생
활동 시기/일시 1694년 - 이현일 유배
몰년 시기/일시 1704년연표보기 - 이현일 사망
추모 시기/일시 1718년 - 이현일 인산서원 제향
출생지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금소 -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금수리
묘소|단소 행정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인산서원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재령
대표 관직|경력 이조판서

[정의]

조선 후기 영덕 출신의 학자·문신.

[개설]

이현일(李玄逸)[1627~1704]은 숙종 연간 퇴계학파를 이끌었으며, 정치적으로는 남인(南人)의 산림(山林)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당쟁의 여파 속에 갑술환국 이후 명의죄인(名義罪人)으로 낙인찍히며 정치적 고초를 당하였다.

[가계]

이현일의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升), 호는 갈암(葛庵)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은보(李殷輔)이며, 할아버지는 현감 이함(李涵), 아버지는 증 이조판서(贈吏曹判書) 이시명(李時明)이다. 어머니는 안동장씨 장흥효(張興孝)의 딸 장계향(張桂香)이다. 부인은 무안박씨(務安朴氏) 박륵(朴玏)의 딸이다.

[활동 사항]

이현일(李玄逸)은 1627년에 경상도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 인량리(仁良里)에서 태어났다. 9세 때 「영화왕(詠花王)」이라는 시를 짓자 사람들이 이현일이 훗날 왕을 잘 보필할 것이라고 하였다. 아버지 이시명을 따라 가학을 익혔으며 형들에게 학문을 배웠는데, 특히 중형(仲兄) 이휘일(李徽逸)을 따라 독서하였다. 20세 때 진사시에 입격하였으나 시제(試題)가 시휘(時諱)를 범하였다고 파방(罷榜)되었고, 22세 때 성시(省試)에서 떨어진 뒤로 과업을 그만두었다.

효종이 승하한 뒤 조정에서 송시열(宋時烈)의 예설(禮說)을 채택하였다. 이에 1666년 영남 유림들이 상소를 준비하며 글짓기를 청하자 ‘복제소(服制疏)’를 지었다. 이때부터 영남을 대표하는 학자로 떠올랐다. 1674년 숙종 즉위 후 남인이 집권하자 영릉참봉(寧陵參奉),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 공조좌랑(工曹佐郎) 등에 제수되었으나 조정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다. 1680년 남인이 실각한 뒤에는 학문에 침잠하였다.

1689년에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자 영남남인을 대표하는 학자로 조정에 출사하였다. 성균관 사업을 시작으로 공조참의, 이조참의, 성균관좨주, 이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하고 이조판서에까지 올랐으며, 경연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정치적 시련이 다가왔다. 당시 이현일은 이조판서로 있었는데, 4월에 조사기(趙嗣基)를 구원하였다는 이유로 함경도 홍원(洪原)으로 유배되었다. 그러나 7월에 1689년에 올린 상소가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모욕하였다는 혐의로 다시 서울로 와 국문을 받고 함경도 종성(鍾城)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 혐의로 인해 이현일은 노론 측에 의해 명의죄인(名義罪人)으로 낙인찍혔다.

3년 뒤인 1697년에 고향과 좀 더 가까운 전라도 광양(光陽)으로 이배(移配)되었고, 74세 때인 1700년에 유배에서 풀려났다. 이후 안동의 금소[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금수리]에 거처를 정하고 후학을 양성하다가 1704년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이현일은 외할아버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와 중형인 이휘일에게 퇴계학맥을 이어받았다. 이현일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옹호하고 「율곡사단칠정서변(栗谷四端七情書辨)」 등을 통해 이이의 학설을 배격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영남 남인의 학설을 퇴계의 설로 완전히 규합하였다. 이현일은 300명이 넘는 제자들을 키워냈고, 이후 이 학맥은 ‘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류치명(柳致明)’을 중심으로 이어지면서 영남학파의 대종을 이루었다. 이현일은 형 이휘일과 함께 『서경(書經)』 「홍범(洪範)」 편의 주석서인 『홍범연의(洪範衍義)』를 편찬하였다.

이현일의 유문(遺文)은 아들이자 제자인 이재가 수합하였다. 그러나 이현일의 정치적 부침이 사후에도 계속되면서 문집 출간은 계속 미루어졌다. 제자인 이재·권두경(權斗經)·이광정(李光庭) 등이 정리한 본을 후에 김성탁(金聖鐸)이 교정하였고, 이현일 사후 100년이 지난 1810년에 후손인 이광진(李光振)·이상채(李相采) 등이 영해에서 간행하였다. 그러나 이 판본은 죄인의 문집을 사사로이 간행하였다는 이유로 파판(破板)되고 주관한 사람들은 유배에 처해졌다. 문집은 이현일 관작이 회복된 1909년에 중간되었고, 이후 속집까지 편찬되었다. 이렇게 완성된 『갈암집(葛庵集)』은 본집 29권 15책, 별집 6권 3책, 부록 5권 3책으로 총 40권 21책의 거질이다.

[묘소]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행정(杏亭)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이현일은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죄적(罪籍)은 그대로였다. 사망 전 숙종이 풀어주었으나 노론의 반발로 다시 환수(還收)되었고, 사후에도 복관(復官)과 환수가 반복되었다. 이 때문에 경종 이후 이현일의 후손과 제자들은 이현일의 신원(伸冤) 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철종(哲宗) 연간에 복관되고 1871년에 ‘문경(文敬)’으로 시호(諡號)가 내려졌으나, 1873년 시호가 취소되었다. 1908년에 작위와 시호가 모두 회복되었다.

1718년 영해의 인산서원(仁山書院)[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소재]에 형 이휘일과 함께 제향되었다. 그러나 1737년 제자 김성탁이 이현일을 변호하다가 유배 간 사건으로 인해 이현일이 철향(撤享)되었고, 1741년에는 서원 자체가 훼철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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