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응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623
한자 朴應天
영어공식명칭 Park Eungcheon
이칭/별칭 경우(景遇),향교암 처사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채광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1년연표보기 - 박응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박응천 영해향교 장의 역임
몰년 시기/일시 1603년연표보기 - 박응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24년 - 박응천 운계서원 제향
출생지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지도보기
묘소|단소 월의답골 -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각리리 지도보기
사당|배향지 운계서원 -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거무역2길 22[거무역리 519]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본관 영해
대표 관직 영해향교 장의

[정의]

조선 전기 영덕 출신의 학자.

[개설]

박응천(朴應天)[1561~1603]은 지역의 문풍과 교화에 힘쓴 향유(鄕儒)로서 운계서원(雲溪書院)에 제향되었다.

[가계]

박응천의 본관은 영해(寧海), 자는 경우(景遇)이다. 고려시대 시중(侍中)을 지낸 박세통(朴世通)의 후손이다. 아버지는 박양우(朴良佑), 어머니는 영양김씨(英陽金氏), 부인은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다. 2남 6녀의 자녀를 두었다.

[활동 사항]

박응천영해향교(寧海鄕校) 장의로 재임하면서 학규(學規) 수정, 난민구제 등 문풍 진작과 교화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영해에 침입해 오자 오성위판(五聖位版)을 등운산(登雲山) 깊은 골짜기 바위 아래 임시로 안치하였다. 이후 8년 동안 손수 관리를 하였고, 난이 평정되자 위판을 향교에 안전하게 환안(還安)하였다. 또한, 박응천은 피난지에서 개척한 전답 등을 모두 향교에 기탁하여 경제력 신장에 일조하였다. 이에 사림에서는 박응천의 공적을 칭송하기 위해 등운산 바위에 단(檀)을 쌓고, 그 바위를 향교암이라 명명하였다. 박응천을 세칭 ‘향교암 처사’라 불렀다.

[학문과 저술]

박응천은 이황(李滉)의 고제 중 한 명인 안동의 김언기(金彦璣) 문하에서 수학하며 행실을 닦았다. 벼슬길에는 나아가지 않았으며, 평생 향촌에 머물며 학문에 침작하였다. 후손들이 박응천의 행적을 기록한 『처사공사적(處士公事蹟)』이 전한다.

[묘소]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각리리 월의답골[月儀畓谷]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1824년 선조인 박제상(朴堤上)·박세통(朴世通)과 함께 경상북도 영덕군 병곡면 거무역2길 22에 소재한 운계서원에 제향되었다. 제향 당시 봉안문은 퇴계 이황의 9세손 이야순(李野淳)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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