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해읍성 터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485
한자 寧海邑城-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예주3길 7[성내리 671-5]
시대 고려/고려,조선/조선
집필자 이창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384년연표보기 - 영해읍성 개축
건립 시기/일시 1448년 - 영해읍성 석성으로 수축
폐지 시기/일시 1910년경 - 영해읍성 철거
소재지 영해읍성 터 -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예주3길 7[성내리 671-5]지도보기
성격 성터

[정의]

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에 있는 고려시대·조선시대 읍성 터.

[개설]

영해읍성은 조선시대 영해도호부의 읍성(邑城)이었다. 조선시대 이후 석성으로 존재하였으나, 1910년 일제의 읍성 철거령에 의해 대부분 고을의 읍성이 철거될 때 영해읍성도 함께 철거되면서 터만 남았다.

[변천]

영해읍성의 처음 축조 시기는 알 수 없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으로 폐허가 된 것을 1384년(우왕 10) 새로 쌓은 것이다. 김을보(金乙寶)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경주와 안동의 병졸 2천 명을 동원하여 한 달 만에 성을 쌓았는데, 당시 읍성은 토석혼축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방어 등을 이유로 부사 박쟁시(朴崢時)의 주도로 1448년(세종 30) 석성으로 수축하였다. 읍성 안에는 관아 건물도 세워졌는데, 영해부 관아에는 동헌(東軒), 객사(客舍), 작청(作廳), 장청(將廳), 군기청(軍器廳), 향청(鄕廳), 대동고(大同庫), 호적고(戶籍庫), 관청고(官廳庫), 공고(工庫), 사창루(司倉樓), 종루(鍾樓), 형옥(刑獄) 등 29동의 건물이 있었다.

1907년 정미 7조약 체결 후 군대를 해산하였는데, 군사적 기능을 상실한 읍성은 이때부터 일제에 의해 지역에 따라 강제로 철거되었다. 영해읍성은 1906년 신돌석 장군이 이곳에서 전투를 벌인 것으로 보아 그 기능은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1914년 제작된 지적도에는 성체가 대지로 나타나고 있어 1910년을 전후하여 성벽이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위치]

영해읍성경상북도 영덕군 영해면 성내리에 있다. 영해면 행정복지센터를 중심으로 그 일대가 영해읍성 자리이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영해읍성은 사대문이 남아 있지 않으나 서쪽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어 영해읍성의 구조와 축조 방법을 알려 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에 읍성 전체에 대한 현황 조사와 남아 있는 체성(體城)의 대표적인 부분의 구조를 파악하고 성곽 내외 주변 지역 조사를 병행하기로 하였다. 지표조사는 안동대학교 박물관에서 담당하였고 2002년 『영해읍성·관아지 지표조사 보고서』가 발간되었다.

[현황]

일부 구간에 장대석과 비교적 큰 할석이 확인되나 대부분 무너진 석재를 다시 쌓아올린 것으로 원형을 알 수 없다. 주민들의 상업 활동과 주거지로 이용되면서 성곽 대부분이 대지화되었다. 영해면 행정복지센터 입구 옆에 관아 부속건물인 영덕 성내리 책방관사가 있다.

[의의와 평가]

영해읍성은 조선시대 영덕 지역의 행정과 군사를 이해하는 기초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며, 현존하는 석성은 대부분 하단부만 남아 있으나 옹성(甕城)의 흔적과 치(雉)의 흔적이 남아 있으므로 체성(體城), 해자(垓字), 치, 옹성, 여장(女墻) 등 성곽의 부대시설을 모두 갖춘 읍성으로 추정된다. 향후 읍성에 대한 시·발굴조사를 통해 정확한 규모와 형태를 복원 정비할 수 있는 기초자료를 확보하고, 읍성과 주변에 대한 제도적인 보완을 통해 더 이상의 훼손을 막는 조치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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