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030
한자 文學
영어공식명칭 Literature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남상권

[정의]

영덕 지역을 중심으로 생성 발전된 문학으로 한국문학사에서 영덕과 관련된 개인 또는 공동체가 창작하고 향유하였던 다양한 갈래의 문학.

[개설]

영덕문학은 지역문학이자 향토문학으로 한국문학사의 범주에 든다. 고대에서부터 고려, 조선, 근대 이후에 이르기까지 영덕 지역을 중심으로 한 개인과 공동체는 다양한 갈래의 문학을 창작하고 향유하였다.

[고대]

영덕 지역은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기 때문에 개인 또는 공동체가 향유하였던 유·무형의 문화가 있었을 것이다. 민속문화는 기층문화로서 시대적 변화를 겪으면서도 전승되기 때문에 현재의 모습이 원형이라고 할 수 없다. 영덕의 구술문학의 유산은 상당히 많은 편이다. 다양한 지명전설과 연기설화, 신원설화, 아기장수설화, 홍수설화, 민요 등이 초시간성을 지니고 다채롭게 전승되어 왔다.

영덕과 관련된 기록문학으로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수록된 「헌화가(獻花歌)」가 거론되고 있다. 「헌화가」의 배경지는 연구자 및 지방자치단체에 따라 다양하게 설정되는데, 영덕에서는 남정면 부경리 지경천 골곡포(骨谷浦) 부근 암석 단애지(斷崖地) 일대로 추정한다.

[고려 시대]

영덕이 역사적 기록으로 본격적으로 주목받던 시기는 고려 고종(高宗)[재위 1213~1259] 때부터이다. 1258년(고종 45) 영해 출신 박송비(朴松庇)[?~1278]가 최씨 무신 정권을 무너뜨린 공로가 있어 덕원소도호부(德原小都護府)로 승격되었다. 덕원소도호부는 훗날 예주목으로 되었고, 1310년(충선왕 2) 영해부로 바뀌었다. 이때부터 영해박씨(寧海朴氏)가 크게 번성하여 중앙 관료로 다수 진출하였다. 가정(稼亭) 이곡(李穀)[1298~1351], 나옹화상(懶翁和尙)[1320~1376], 목은(牧隱) 이색(李穡)[1382~1396], 담암(淡庵) 백문보(白文寶)[1303~1374] 등 명현들이 영덕을 처가 또는 외가를 두면서 위상이 높아졌다.

영덕 출신을 중심으로 한 문학이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시기도 이때부터라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 충숙왕(忠肅王)[재위 1313~1330, 복위 1332~1339] 때부터 우왕(禑王)[재위 1374~1388] 때까지 활동한 나옹화상, 충혜왕(忠惠王)[재위 1330~1332] 때 등과(登科)하여 우왕, 창왕(昌王)[재위 1388~1389] 때까지 성리학자로서 정당문학(政堂文學)[고려와 조선 시대에 국가 행정을 총괄하던 관직], 문화시중(門下侍中)[고려 시대 종1품 중서문하성의 수상직]을 역임하였던 목은 이색, 충숙왕 때 등과하여 공민왕 때 밀직제학(密直提學)[고려 말기 밀직사에 둔 정3품의 관직]을 역임하였고, 고려사에서 '단군기원설'을 처음 제창했던 백문보 등을 들 수 있다. 백문보, 이색, 나옹화상은 모두 외가인 영해에서 태어났다. 이들이 남긴 문집으로 볼 때 출사 또는 출가 후에도 동향 출신으로서 빈번하게 교류를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색백문보의 바둑 실력이 최영(崔瑩)[1316~1388]과 맞수였다고 문집에 기록하였고, 백문보와 이색나옹화상의 문집에 서문을 남겼다. 백문보는 벼슬을 마치고 동생과 함께 가솔을 이끌고 외가인 영해로 낙향하였지만, 나옹화상과 이색은 공교롭게도 경기도 여주에서 생을 마쳤다. 이색은 『목은집(牧隱集)』을 백문보는 『담암일집(淡庵逸集)』을 남겼고, 나옹화상은 불교 가사 『사왕가(西往歌)』, 『토굴가(土窟歌)』 및 불교 어록을 담은 『나옹화상집(懶翁和尙集)』을 남겼다. 그 외 신득청(申得淸)[1332~1392]의 『역대전리가(歷代轉理歌)』도 고려 시대 영덕의 문학으로 논의되고 있다.

[조선 시대]

영덕은 조선 중후기로 들면서 소안동(小安東)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이는 고려 말부터 재지사족(在地士族)[조선 시대 향촌 사회에 머물러 있던 지식 계층]이 형성되어 조선 중기 이후로 사족의 폭이 넓어지고 당대 주류 사상인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선비들을 다수 배출하였기 때문이다. 영해의 팔종가(八宗家)를 비롯한 다수의 거대 문중이 성장하였고,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 사림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 폭넓은 혼반(婚班)을 형성하였다.

백현룡(白見龍)[1543~1622], 권대겸(權大謙)[1659~1729], 이현일(李玄逸)[1627~1704], 남노명(南老明)[1642~1721], 남구명(南九明)[1661-1719], 이재(李縡)[1680~1746], 박사주 등 명현(名賢)들도 연이어 배출되었다. 이들의 학문 세계와 더불어 수만 편에 이르는 한시(漢詩)가 이 지역 선비들이 남긴 문집에서 발견되고 있다. 영덕 지역의 종가 및 고택에 산재한 수많은 전적은 이 지역이 뿌리 깊은 유교 문화의 산실이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렇듯 영덕 지역의 재지사족과 사림의 폭넓은 성장은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에 항일운동의 사상적 배경이 되었다. 이수악(李壽岳)[1845~1927], 김도현(金道鉉)[1852~1914], 신돌석(申乭石)[1878~1908] 등이 창의(倡義)한 안동의진(安東義陣), 진보의진(眞寶義陣), 영릉의진(寧陵義陣)은 수많은 우국지사를 결집한 것이다. 가사문학의 대가인 윤선도(尹善道)[1587~1671]는 영덕으로 유배를 와서 20여 편의 시부(詩賦)를 남겼다.

[근대 이후]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영덕의 문학은 주류는 한시문이었다. 근대 교육이 도입되었지만 근대 문학 작가나 시인의 등장은 여타 지역에 비해 늦은 편이었다. 1920년대 논설 위주의 동인지 『야봉(野峰)』이 3집까지 발간되었다고 하지만 현재로서는 확인할 수 없다. 1933년 지품면 원전리 출신의 임영창(林泳暢)이 『종교시보』에 시조 「일편단심」을 발표한 것이 영덕 근대 문인의 첫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영덕 지역의 문풍(文風)이 여전히 한문학적 전통의 압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영덕 지역의 근대 문학이 본격적으로 발아한 것은 8.15광복과 6.25전쟁 이후부터이다. 최해운이 『문예』지에 「유성(流星)」을, 박윤환이 『신문학』지에 「매아미에게」가 각각 추천되면서 본격적인 근대 문학인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1953년 박윤환과 이장희는 각각 시집 『전설』과 『서정의 여로』를 내었고, 1955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출신 최해운 등이 지역 문학도와 더불어 동인지 『토벽(土壁)』을, 박윤환, 최복해, 남병규, 권경달, 남용진 등이 동인지 『향림』을 만들어서 영덕의 근대 문학 문인들을 본격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에는 이장희, 남경모 중심의 『꽃조개』, 『철령문학회』 등의 문학 동인으로 발전되었고, 이를 통한 문학적 소양의 확대는 다수의 지역 문인들이 배출되는 매개가 되었다. 오늘날 동인지 『영덕문학』한국문인협회 영덕지부 소속 문인들의 뿌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역 문학으로서의 활성화와 더불어 출향인들의 문단 등단과 창작활동도 활발하며, 고향 문인과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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