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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899
한자 朱明宇
영어공식명칭 Joo Myeongu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진호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1년 2월 24일연표보기 - 주명우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주명우 지품면 3.1독립운동 참여
몰년 시기/일시 1952년 8월 5일연표보기 - 주명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2년연표보기 - 주명우 대통령 표창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주명우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19년 3월 19일 - 지품면 3.1독립운동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황장리 295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영덕군 강구면 강구리 345 지도보기
활동지 원전동 교회 -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원전리 지도보기
활동지 원전동 시장 -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원전리 지도보기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남자
대표 경력 원전동 교회 집사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주명우(朱明宇)[1881~1952]의 거주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 황장리 295이다.

[활동 사항]

1919년 2월 말 고종 국장을 참례하기 위해 영덕군에서 권태원(權泰源)·정규하(丁奎河)·남세혁(南世爀)·남효직(南孝直)·권상호(權相鎬) 등이 상경하였다가, 3월 1일 일어난 3.1운동을 직접 목격하였다. 또한 낙평동 북장로파 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도 3.1 운동을 보고 영덕으로 귀가하였다. 김세영 등은 영덕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치기로 결의하였다. 이때 정규하 등은 여러 인사들에게 사람을 보내 시위 참여를 권유하였는데, 황장동의 주명우에게는 김중명(金重命)을 보냈다. 당시 북장로파 원전동 교회의 집사(執事)였던 주명우는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일제에 불만을 갖고 독립을 희망하던 중 3월 11일경 『매일신보』 보도 기사를 통해 서울 기타 전국 각지에서 ‘조선독립시위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인지하고 독립운동을 일으킬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그런 가운데 3월 16일경 교회 영수(領袖)인 김중명에게 독립만세를 권유받고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하였다. 주명우는 3월 19일 아침 원전동 시장 장날에 맞추어 거사를 일으키기로 하고, 종이 깃발을 만들어 ‘대한독립만만세’라고 적었다. 이어 11시 30분경 교회에 나가 신자 14~5명에게 독립만세를 권유하였다.

정오 무렵 지품경찰관주재소 앞에 결집한 군중들이 독립 연설을 함으로써, 지품면 3.1독립운동은 시작되었다. 주명우는 군중을 향하여 “한국 독립의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해 죽을 때까지 멈추지 말아야 한다.” 또 “죽기를 결심하고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라고 연설하였다. 연설이 이어지는 가운데 교회 신자들과 군중들도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연호하였다. 그러자 주재소 일경들이 주도 인사 주명우 등을 체포하고 독립만세를 제지하면서 군중들은 해산하였다. 그런데 주명우의 부인 윤악이(尹岳伊)가 체포 소식을 듣고 격분하여 3월 24일 원전동 시장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윤악이의 거사는 부부가 독립만세를 외친 사례 가운데 각각 독자적인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한 유일한 사례이다.

지품면 3.1독립운동으로 7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주명우는 4월 19일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공소를 제기하였다. 5월 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 취소에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상고하였으나, 6월 5일 고등법원에서 상고를 기각하여 형이 확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1982년 대통령표창,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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