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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791
한자 李鍾律
영어공식명칭 Lee Jongryul
이칭/별칭 도성,산수,선교공남,정약당,이상,이남철,이균,이일구,민족건양회,민족일보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허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02년연표보기 - 이종률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1년 - 이종률 점곡공립보통학교 편입
수학 시기/일시 1924년 - 이종률 배재고등보통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26년 - 이종률 경신학교 편입
수학 시기/일시 1927년 - 이종률 일본 와세다대학 입학
활동 시기/일시 1925년 - 이종률 정학회 창립
활동 시기/일시 1926년 - 이종률 6.10만세운동 참여
활동 시기/일시 1926년 - 이종률 명덕청년회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28년 - 이종률 재일 조선청년동맹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28년 - 이종률 조선교육신문사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30년 - 이종률 사회실정조사소 창립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이종률 민족건양회 창립
활동 시기/일시 1960년 - 이종률 민족청년동맹 창립
활동 시기/일시 1961년 - 이종률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창립
활동 시기/일시 1961년 - 이종률 『민족일보』 편집국장 취임
몰년 시기/일시 1988년 3월 13일연표보기 - 이종률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00년 - 산수이종률선생기념사업회 설립
추모 시기/일시 2015년연표보기 - 이종률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출생지 동대산 -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거주|이주지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남정리 126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점곡공립보통학교 -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학교|수학지 배재고등보통학교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학교|수학지 경신학교 -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
학교|수학지 와세다대학 - 일본 도쿄도 신주쿠구 니시와세다
묘소 백운공원 - 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두명리 산46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민족일보』 편집국장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이종률(李鍾律)[1902~1988]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도성(度聲)·산수(山水)·선교공남(汕僑空男), 호는 정약당(靜若堂), 아명은 이상(李象)이다. 이남철(李南鐵)·이균(李鈞)·이일구(李一九) 등을 가명과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경상북도 영일군 북면 동대산 밑 산촌[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에서 아버지 이규환(李圭煥)과 어머니 벽진 이씨(碧珍 李氏) 사이의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민숙례(閔淑禮)와 결혼하여 2남 5녀를 두었다. 본적지는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 남정리 126이다.

[활동 사항]

이종률은 어린 시절에 한학을 익혔으며, 1921년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의 점곡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하였다. 민족의식이 싹트면서 안동의 민족 운동가들이 운영하던 동명학교(東明學校)에 진학하였다. 1924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학하였으며, 경성청년회에 참여하여 집행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5년 5월 사회 과학을 연구하는 학생 단체 공학회(共學會)의 창립을 주도하고, 시사 잡지 『정론(正論)』의 발간에 참여하였다.

일제 탄압과 경제적 어려움으로 1925년 11월에 배재고등보통학교를 자퇴하고, 1926년에 경신학교(儆新學校)에 편입하였다. 1926년 6.10 만세 운동 이후 일본으로 피신하였으며, 1926년 말에 귀국하여 강원도 이천군 판교면에서 명덕청년회를 결성하고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에 진학하고, 조선인단체협의회의 부인부장, 신간회 도쿄(東京)지회의 간사로 활동하였다. 근우회 도쿄지회의 활동에도 참여하고, 1928년 3월 재일 조선청년동맹을 결성하였다. 1928년 7월 박노수(朴魯洙)와 함께 조선교육신문사를 설립한 후 귀국하였다.

귀국 후 서울의 경성고학당 교사로 재직하면서 1928년 휘문고등보통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의 동맹 휴학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전국 학생이 동정 파업할 것을 제안하는 ‘전조선학생맹휴옹호동맹’ 명의의 격문을 작성하였다. 격문을 일본의 조선교육신문사에 보내 제작한 후 몰래 들여와 서울의 각 학교에 배포하였다. 격문 작성 및 배포 활동으로 징역 10월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르고, 1930년 1월 23일에 만기 출옥하였다.

1930년 4월 조선 사회의 분석과 사회 운동의 논리적 토대 제공을 목적으로 사회실정조사소를 창립하고, 기관지 『이러타』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1930년 6월 경상북도 영덕군 남정면의 동생 집에서 불온 서류를 소지한 혐의로 일제 경찰에 붙잡히는 등 여러 차례 구금되었다. 1933년 4월 형평청년전위동맹 사건과 ‘미야케 교수 사건’으로 징역 2년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른 후 1936년 6월에 풀려났다.

해방 후 조선학술원의 서기국 위원이자 상임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1월 김창숙, 이시영 등과 과학적 정치 노선의 확립과 실천을 위한 민족건양회를 창립하였다. 1947년 2월 이극로(李克魯), 정이형, 조봉암(曺奉巖) 등 중도 성향의 인사들과 민주주의독립전선을 결성하였다.

1952년 최익환과 박진목이 추진한 종전 운동에 참여하고, 부산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로 부임하여 정치사상사, 한국정치사 등을 강의하였다. 195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권 후보의 단일화를 위한 활동에 나섰다. 1950년대 후반에 부산의 『국제신보』와 『부산일보』의 논설 고문을 지냈고, 대구에서 발간된 『영남일보』의 논설위원과 편집국장을 지냈다.

4월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되자, 1960년 6월 통일을 지향하는 진보적 청년 단체 민주민족청년동맹을 창립하였다. 이어 민족건양회와 민주민족청년동맹을 기반으로 1961년 2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를 창립하였다.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산하에서 통일 방안을 연구하는 통일방안심의위원회의 위원으로서 활동하며 남북 협상 통일론을 주장하였다. 1961년 2월 진보적 신문 『민족일보』의 창간에 참여하고 편집국장을 지냈다.

5.16군사쿠데타 후 민족자주통일방안심의위원회 사건과 『민족일보』 사건으로 징역 10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러다가 1965년 12월 형 면제로 풀려났다. 1970년 경상남도 양산의 개운중학교[현 효암고등학교] 교감에 부임하였다. 1988년 3월 13일 오랜 투병 끝에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 자택에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이종률의 저작물로는 1960년 국제신문사에서 『현순간정치문제소사전(現瞬間政治問題小辭典)』, 1971년 통문관에서 『국조사(祖國史)의 분열과 통일의 주조(主潮)』, 1979년 무림사에서 『기미(己未)를 알자』, 1989년 들샘에서 『민족혁명론』이 각각 간행되었다.

[묘소]

이종률의 묘는 부산 백운공원[부산광역시 기장군 정관읍 두명리 산46]에 있다.

[상훈과 추모]

2000년에는 산수이종률선생기념사업회가 설립되었다.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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