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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788
한자 李謙浩
영어공식명칭 Lee Gyeomho
이칭/별칭 이석
분야 역사/근현대,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5년 8월 12일연표보기 - 이겸호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0년대 - 이겸호 신흥무관학교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24년 9월
몰년 시기/일시 1942년 8월 29일연표보기 - 이겸호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0년연표보기 - 이겸호 건국포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이겸호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24년 9월 - 창수사건
출생지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 239 지도보기
학교|수학지 신흥무관학교 - 중국 지린성 통화현
활동지 서간도 - 중국 지린성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서로군정서 요원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덕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이겸호(李謙浩)[1895~1942]는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오촌리에서 이규달(李逵達)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이명은 이석(李石)이다.

[활동 사항]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김성로·신형섭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만주로 건너갔다. 이겸호는 이상룡(李相龍)·김동삼·박경종(朴慶鍾) 등의 지휘를 받으면서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요원으로 활동하였다. 1919년 서로군정서의 지시에 따라 국내에 들어왔다가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1920년 11월에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7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나온 뒤 영해에서 남효상(南孝相)·권영탁(權寧鐸)·신명섭(申命燮) 등과 함께 태화학원(太和學院)을 설립하였다.

1922년 음력 9월 이겸호는 대구에 소재한 신형섭의 집에서 대한통의부 소속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 제3중대 제1소대장 이덕숙(李德淑)을 만났다. 이겸호와 이덕숙은 신형섭의 집에서 군자금 모집 문제를 협의한 뒤, 이덕숙의 거처를 창수면의 이겸호집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권총과 실탄, 대한통의부 경고문, 권고문 등을 창수면에 있는 이씨 문중의 별장 훤서암(萱棲庵)에 숨겨 두었다. 이덕숙은 서당에 거주하면서 상인으로 가장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군자금 모집 과정에서 영양의 권동호(權東鎬)를 동지로 규합하여 활동해 나갔다.

이겸호는 두 사람과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결의하고, 먼저 창수면의 부호 김상락(金相洛)을 찾아가 군자금을 요구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이겸호와 함께 활동하던 이덕숙은 일제 경찰에 군자금 모집활동이 노출되자, 일제 경찰을 제압하고 훤서암에 감추어 두었던 권총과 실탄을 가지고 달아났다. 이른바 창수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창수사건이 일어난 지 6개월여 만인 1924년 9월에 이겸호는 일제 경찰의 수사 끝에 군자금 모집 활동의 사실이 드러나 체포되었다. 이덕숙도 피신 끝에 경기도에서 피체되었으며, 권동호도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겸호는 1925년 3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받았으며, 이덕숙은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겸호는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후 다시 망명하여 만주에서 이상촌을 건설할 계획을 세우고 활동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사전에 발각되어 일제 경찰에 피체되어 투옥되었다. 일제 말기에는 일제의 예비 검속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 수감 도중 건강이 악화되어 석방되었다. 석방된 후 서울의 흥국사(興國寺)에서 요양을 하던 중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0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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