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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500375
한자 左右翼-對立
영어공식명칭 Confrontation between the Left and Right
이칭/별칭 좌우익의 갈등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북도 영덕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용성

[정의]

미군정 시기 경상북도 영덕 지역에서 일어난 좌익과 우익 간의 충돌과 대립.

[개설]

광복 이후 4개월이 지난 1945년 12월 말 무렵 한반도의 신탁통치를 놓고 모스크바에서 3개국 외상이 회의를 가졌다. 마침내 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한반도에서는 좌우익 간의 극심한 대립과 갈등이 빚어졌다.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은 경상북도 영덕 지역에서도 일어났다.

[역사적 배경]

태평양전쟁[1941~1945]에서 일본이 미국에 패하자 일본의 점령지인 한반도에서는 갑자기 국가 정치 권력의 공백이 생겼다. 국가 정치 권력의 공백을 1945년 8월 말경에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건국준비위원회[건준]가 제일 먼저 채웠다. 그때까지 건국준비위원회는 전국에 145개의 지부가 있었다.

[경과]

건국준비위원회는 9월 6일 해산하고 조선공산당과 합작하여 자칭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그리고 각 시군 단위별로 인민위원회와 치안대를 세워 지방자치 형태의 조직을 만들었다. 이러한 새로운 조직원들은 기존 일제시대 관리들로부터 행정조직과 치안조직을 물려받았다. 영덕 지역에서도 12월에 이경석(李慶錫)·이부암(李富岩)·권병술(權炳述)·이양우(李良雨)·권병희 등이 주도하여 인민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때 농민조합·부녀동맹·청년동맹도 결성되어 인민위원회와 연계하여 지역의 정치 활동을 주도하였다. 당시 영덕군 인민위원회와 부녀동맹의 간부들은 다음과 같다.

1. 영덕군 인민위원회

위원장 이경석, 치안대장 권병술, 총무부장 권병화, 영해면 인민위원회위원장 권병희, 영덕면 인민위원회위원장 이태석, 강구면 인민위원회위원장 서창구·정해봉[남로당 강구면책], 남정면 인민위원회위원장 이병화, 달산면 인민위원회위원장 이기양, 지품면 인민위원회위원장 신수형[초대]·김수영[2대]·이응춘[3대], 축산면 인민위원회위원장 배금함, 이○○, 박명옥, 병곡면 인민위원회위원장 권삼달·주순술·김혁동, 창수면 인민위원회위원장 남영희

2. 영덕군 부녀동맹

위원장 임익선(林益善), 부위원장 이종생(李種生), 총무부장 이용해(李龍海), 재무부장 주덕희(朱德熙), 조직부장 이수연(李壽連), 선전부장 정영익(鄭永益), 소녀부장 김을선(金乙先)

당시 각종 정치 조직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던 인사가 많았다. 영덕군 인민위원회와 부녀동맹에 참여한 인사들은 좌우익의 이념을 떠나 정치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1945년 12월 17일에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국·영국·소련 등 3국 외상의 회의에서 신탁통치 안이 발표되자 좌우익 간의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즉, 처음에는 모든 정치 세력이 신탁통치안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1946년에 들어오면서 좌익 진영에서 신탁통치안에 찬성하자 우익 진영에서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만들어 대처하였다. 그러자 좌익 진영에서도 ‘민주주의민족전선’을 조직하여 대처함으로써 양 진영은 대립 투쟁의 국면으로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결과]

신탁통치를 둘러 싼 진영 간의 갈등과 대립은 경상북도 지역에서도 일어났다. 우익 진영에서는 1946년 3월 17일에 기존의 조직인 ‘조선독립경북촉성회’와 ‘탁치반대국민총동원경북위원회’를 통합하여 ‘대한독립촉성경북국민회’를 대구에서 발족하였다. 그리고 경상북도 전역에 지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반면 좌익 진영에서는 기존의 여러 단체를 3월 5일에 ‘민주주의민족전선 경북위원회’로 통합하여 세력을 다져 나갔다.

한편, 영덕 지역에서 우익 진영은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영덕지부’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영덕청년연맹’, ‘애국부인회’ 등을 결성하였다. 반면에 좌익 진영은 기존의 인민위원회와 여러 관련 단체를 정비하였다. 이처럼 양 진영은 지역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서로 대결하였다. 그런 가운데 1946년 10월 4일 양 세력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좌익 세력에 의해 달산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6·25전쟁 기간 중에는 국민보도연맹사건이 발생하여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하기도 했다.

[의의 및 평가]

영덕 지역에서 양 진영은 1946년부터 1947년까지 서로 극심하게 대립하였다. 급기야 1948년 2월부터는 단독정부 수립을 놓고 크게 충돌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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