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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100714
한자 金弘翼旌閭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유계2리 한다리마을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고수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41년연표보기 -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794년연표보기 - 개건
현 소재지 김홍익 정려 -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유계2리 한다리마을 지도보기
성격 정려
양식 겹처마 팔작지붕|초익공 양식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 음암면 유계2리 한다리마을에 있는 조선 후기 충신 김홍익(金弘翼)의 정려.

[개설]

김홍익[1581~1636]의 자는 익지(翼之), 호는 묵재(黙齋)경주 김씨(慶州金氏) 서산 입향조인 김연(金堧)[1494~?]의 증손자이자 찰방(察訪) 김적과 좌윤 최원지(崔遠之)의 딸 화순 최씨(和順崔氏)의 아들이다.

1632년(인조 10) 충청도 연산현감으로 재직 중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 2,400여 명을 모집하여 분연히 일어났다. 충청감사 정세규(鄭世䂓)와 함께 의병을 이끌고 인조가 파천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진격하던 중 쌍령(雙嶺)[경기도 광주]에서 적병을 맞이하여 격전 끝에 화살에 맞아 순절하였다. 김홍익을 보좌하던 통인(通引) 장사정(張士貞)이 김홍익의 시체를 안고 나오던 중 장사정 또한 적군의 칼에 맞아 죽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장사정의 처 또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고 한다.

[위치]

서산시 음암면 유계2리 마을 회관 건너편으로 약 50m 전방에 남동향으로 김홍익 정려(金弘翼旌閭)가 자리하고 있다.

[변천]

조정에서 김홍익과 장사정, 그리고 장사정의 처 세 사람의 충절을 기려 1741년(영조 17)에 정려가 내려졌다. 1791년(정조 15)에 다시 증직을 논의하여 1794년(정조 18) 이조판서에 추증, 충민(忠愍)이라 시호를 내렸다. 한편 1803년(순조 3)에도 김홍익의 행적이 다시 논의되어 그 후손들을 관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고, 장사정과 화순 최씨의 정려는 고쳐 짓도록 하였다.

[형태]

방형의 시멘트 기단 위에 세워진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건물로, 8각 주초석 위에 둥근기둥을 올렸다. 전면과 측면 중앙 위는 홍살로 처리하였고, 양 측면의 중방 밑과 후면은 시멘트벽이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팔작지붕에 초익공 양식의 건물이다.

[현황]

2011년 현재 김홍익 정려에는 1741년의 명정 현판이 걸려 있다. 명정 현판에는 ‘유명조선충신증자헌대부이조판서겸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시충민공행통훈대부연산현감김홍익지문(有明朝鮮忠臣贈資憲大夫吏曹判書兼知義禁府事五衛都總府都總管諡忠愍公行通訓大夫連山縣監金弘翼之門)’이라 적혀 있고, 시호를 받던 1794년에 개건하였음을 부기하고 있다. 한편 남쪽으로 20m 정도의 거리에 김유경 정려(金有慶旌閭)가 있는데, 이들 정려를 보호하기 위해 주변에 시멘트로 담이 둘러져 있고 출입문이 만들어져 있다.

[의의와 평가]

서산시 음암면 유계리 한다리마을은 조선 전기 김연이 마을에 입향한 이후 경주 김씨가 오랫동안 삶의 터전을 마련한 곳이다. 마을 입구에는 충신 김홍익과 효자 김유경(金有慶)의 정려가 있는데, 이 두 정려는 10년 정도를 간격으로 비슷한 시기에 건립되어 당시 서산 일대 경주 김씨의 사회적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김홍익의 행적을 기리기 위한 일련의 활동이 정려 건립 후 순조 대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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