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1354
한자 傳統-明紬-
영어공식명칭 Traditional Weaving by Hand, Myeongju Jjagi And Mumyeong Jjagi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본리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여수경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88년 4월 - 조옥이 중요 무형 문화재 명주 짜기 기능장으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0년 2월 - 이규종 중요 무형 문화재 명주 짜기 명예 기능 보유자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0년 8월 - 백문기 경상북도 무형 문화재 무명 짜기 기능 보유자로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6년 12월 - 안옥란 경상북도 무형 문화재 무명 짜기 전수 조교로 선정

[정의]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본리리 두리실 마을에서 전승된 전통 길쌈명주 짜기무명 짜기.

[개설]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본리리 두리실 마을에는 안동 권씨 가문의 여성을 통해서 명주 짜기무명 짜기가 전승되었다. 여성의 주요 경제 활동 중 하나였던 길쌈은 직물을 짜는 모든 과정을 일컫는 말이며, 그중 두리실 마을에는 안동 권씨 둘째 며느리 조옥이 명주 짜기 보유자와 셋째 며느리 백문기 무명 짜기 보유자를 통해서 전승되었다.

[여성의 면업 활동이 지니는 의의]

길쌈이란 무명, 명주, 삼베, 모시 등의 직물을 짜는 일련의 모든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직물은 조선 시대를 넘어 1950년대까지 현물 화폐로 사용되었고, 길쌈은 농업과 함께 중요한 생업 중 하나로 인식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남녀의 직업을 ‘남경여직(男耕女織)’으로 규정하고, 농업만으로 어려운 생계의 부족한 부분을 여성의 부업 즉 길쌈으로 보충하라는 등 여성의 면업 활동을 주요 경제 활동으로 인식하였다.

가정 내 여성의 면업 활동에 대한 권장과 중요성은 조선 후기 문헌과 글에서도 확인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가난한 선비가 생계 걱정하지 않고 학문에 열중하기 위해서는 뽕나무를 심고 아내에게 부지런히 양잠을 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하였으며, 이덕무(李德懋)의 『사소절(士小節)』에는 “선비의 아내는 집안의 생계가 궁핍하면 약간 살아갈 도리를 마련하여 일을 하는 것이 안될 것이 없다. 길쌈을 하고 누에를 치는 일은 진실로 그 근본이 되는 일이다. 이는 생계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역시 부녀자의 수공의 한 가지이다.”라고 서술하기도 하였다.

면업 활동은 단순히 길쌈으로 옷을 지어 입는 자급자족의 의미가 아니라 세금 납부와 화폐 등과 같이 자산적 가치로 인식되었으며, 주요 노동 활동으로 인식되었다. “길쌈 잘하는 며느리가 들어오면 논밭을 산다.”는 말은 면업 활동의 중요성을 대변해 주기도 한다. 이러한 배경에서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전승된 명주 짜기무명 짜기 또한 자급자족에서 시작되었지만, 이후 만주로 떠난 남편을 대신하여 가정 경제를 일으키기 위한 수단으로 행해졌던 점에서 여성 중심의 주요 생산 노동으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성주군 두리실 마을과 두리실 명주]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志)』 「성주목」 조에는 성주군은 땅이 비옥하고 바람이 따뜻하며 사람들은 화려한 것을 숭상하고 여인들은 일을 잘한다고 기술하고 있다. 토질은 벼, 조, 기장, 피, 삼, 뽕, 목화 등의 재배에 알맞아서 일찍이 명주를 비롯하여 무명, 삼베, 목화씨, 쌀, 조, 콩 등을 바쳤고, 토산물로는 종이, 옻, 도자기와 같은 공예품을 비롯하여 당귀와 백부자, 생지황, 주치, 낭아(狼牙) 등의 약재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여러 가지 특산물 중에서 뽕나무를 재배하여 짠 명주는 왕실 진상용 공물로 바쳤다고 전해진다. 성주목(星州牧)의 대표 공물 중 하나였던 명주는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본리리 두리실 마을의 것이 특히 잘 알려져 있다. 두리실 마을에서 짠 명주는 두리실 명주라 부르기도 한다. 두리실은 마을 앞으로 ‘새내’라 불리는 하천이 낙동강으로 합류하며 너른 앞들을 형성한다. 지금의 과수원은 광복 전까지 뽕나무밭이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까지 이어진 두리실 마을의 길쌈은 50여 가구에서 40여 가구가 할 정도로 성행하였다. 한 집에서 봄누에 1장, 가을누에 2장을 풀면 명주 12필을 제직하였는데, 두리실 마을에서는 연평균 300~400필의 명주를 제직하였다. 연중 길쌈명주 짜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겨울에는 목화를 따 무명을 짜고, 초여름과 가을엔 누에고치에서 뺀 실로 명주를 제직하고, 삼복(三伏)에는 삼베를 만들었다고 하니 연중 가정 내에서 베틀 소리는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조옥이 보유자 역시 만주로 떠난 남편을 대신하여 길쌈을 통해 가정 경제를 꾸렸고, 명주를 짜서 논 6마지기와 밭 1,322㎡[400평]를 사 자식을 공부시켰다고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길쌈 잘하는 며느리 문전옥답보다 낫다’는 말은 가정 경제에서 길쌈의 중요성과 고단한 길쌈 노동을 대변해 주기도 한다.

[안동 권씨 며느리를 통해 전승된 두리실 마을 명주 짜기와 무명 짜기]

두리실 명주의 효시는 1456년(세조 2) 두리실 마을에 입향한 권유검(權有儉)[행가산 군수]에서 시작한다. 권유검의 부인인 여흥 민씨(驪興閔氏)는 당시 가족의 옷감을 조달할 목적으로 명주를 직접 짜기 시작하였고, 그 기능은 며느리를 통해서 전승되었다. 안동 권씨 족보에 전하는 두리실 명주 짜기는 ‘여흥 민씨[단종 2]-성주 여씨-성산 이씨-서흥 김씨-영월 엄씨-밀양 박씨-성주 전씨-벽진 이씨-경산 이씨-남평 문씨-경주 김씨-고령 신씨-동래 정씨-남양 홍씨-강석경, 조옥이, 백문기, 이규종’ 며느리로 전승되어 왔다.

조옥이 보유자의 큰동서 강석경은 시어머니 남양 홍씨에게서 명주 짜기를 배웠고, 집안의 둘째 며느리인 조옥이 보유자에게 전수하고 다시 조옥이 보유자는 아랫 동서인 백문기와 이규종에게 전수하였다. 조옥이 보유자의 아랫 동서 백문기는 1990년 경상북도 무형 문화재 무명 짜기 기능 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막내 동서 이규정은 조옥이 보유자 사망 후 전수 교육 조교에서 명예 보유자로 인정되었다.

[안동 권씨 둘째 며느리 조옥이 보유자의 삶과 명주 짜기]

명주 짜기 조옥이 보유자는 만 18세에 안동 권씨 둘째 며느리가 되었다. 친정은 두리실 마을과 멀지 않은 영암면으로 집안은 밭 1,652.89㎡[500평] 이상을 경작하고 큰아버지가 서당을 세워 글을 가르치던 양반 가문이었다. 친정어머니를 도와 어릴 때부터 명주 짜기와 무명, 삼베 등 길쌈을 배웠다. 시집온 이듬해 큰동서의 남편이자 큰시숙이 전염병으로 운명을 달리하고, 남편은 장사를 위해 일본으로 떠났다.

병으로 죽은 큰아들과 객지로 떠난 작은아들로 인해 시아버지가 같은 해 사망하면서 의지할 데 없는 시집살이를 하였다. 결혼 후 2년 뒤 외동딸을 낳았지만 남편은 연락이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주에서 전염병으로 객사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남편을 보낸 뒤 집안 지킴이가 되어 긴 시간을 명주 짜기무명 짜기로 보냈다. 연간 200자 5필 정도의 베를 짰는데 낮에는 밭일을 밤에는 베틀에 앉아 베를 짜는 일을 반복하였다. 베틀로 천을 짜며 불렀다는 「베틀 노래」는 여인의 고된 시간과 자신이 짠 베를 아까워서 차마 입지 못하고 걸어두고 만져보다 때가 탄 정황을 잘 묘사하고 있다.

“처젠처제 키큰처제/ 베짤짠다 소문났네 그베짜서 누굴줄레/ 우리오빠 장가갈때/ 가마휘장 둘레줄레/ 그남치기 누굴줄레/ 이내적삼 비었드니/ 깃도없고 섶도없네/ 앞집에야 내동모야/ 뒷집에야 내동모야/ 깃한자루 섶한자루/ 뀌여다고 뀌여다고/ 맨드라미 깃을달고/ 봉숭아리 섶을달아/ 입어보니 때가묻고/ 벗어보니 입구접고/ 만치다가 다떠랐네”

눈이 밝고 손끝 야무져 길쌈을 잘했던 친정어머니로부터 고치를 수확하고 명주를 짜는 일을 도우며 배웠던 조옥이 보유자의 솜씨는 시집에서 빛났다. 그녀의 베 짜는 솜씨는 동네에서도 자자하였다. 성주 시내에 소문이 난 그녀의 명주는 서로 탐을 내고 사 가려고 주문을 하였고, 오일장이 설 때 시장에 내놓으면 “베가 곱다”고 하면서 서로 웃돈을 주고 사 가기 바빴다고 한다. 살아생전 쪽 찐 머리에 단아했던 그녀는 섬세하면서도 차분한 성격이었고, 매우 곱고 치밀하게 짜야 하는 명주 짜기와 어울리는 성격이기도 하였다. 평생을 베틀에서 앉아 베틀과 벗하며 살았던 어머니를 기억하는 외동딸 권인실은 명주를 짜는 것만은 배우지 않았다고 회고하기도 하였다.

[명주 짜기 과정]

명주 짜기 과정은 누에치기-실써기-실 뜯기-실 내리기-베 날기-바디 실 꿰기-베매기-꾸리 감기-베 짜기로 이루어진다. 재료 준비에 해당하는 누에치기는 명주의 주 재료인 누에고치를 준비하는 과정이다. 뽕나무를 길러 누에를 친 후 여기서 고치를 만드는 과정으로 연중 2~3회 누에를 치는데, 이를 춘잠(春蠶), 하잠(夏蠶), 추잠(秋蠶)이라 부른다. 두리실 마을은 5월과 8월 춘잠과 추잠만을 하였다.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풀어서 타래실을 만드는 과정을 실써기[제사(製絲)]라 한다. 물을 넣고 끓인 솥 안에 누에고치를 넣고 젓가락으로 저어 실을 푸는 과정이다. 실을 풀 때 누에고치를 얼마나 넣느냐에 따라 열새~보름새까지 직조 가능한데, 고치를 많이 넣을수록 실의 굵기는 굵어진다. 실써기 과정에서 누에고치 상태가 좋지 않으면 자주 끊기게 된다.

실 뜯기는 실을 한 올씩 떼어내며 건조시켜 습기를 제거하는 과정이다. 말린 실은 ‘돌 것’이라 불리는 도구에 걸어 감는데 이것을 실 내리기라 부른다. 10개의 명주 가락을 준비하여 각 가락에서 명주실 끝을 찾아내어 실을 감는데, 굵기가 일정하지 않은 실이 나올 경우 따로 감거나 제거한다. 베 날기는 직물의 올 샛수만큼 직물 한 필 길이에 맞춰 날실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바디 실 꿰기는 베를 맬 때 날실이 제 자리에 걸리도록 하는 작업이다. 바디의 경우 개인에 따라 여러 샛수의 바디를 보유한다.

베매기는 날실에 풀을 먹여 보푸라기를 방지하고 실을 윤기 나고 탄탄하게 만드는 작업이다. 명주는 실의 굵기가 얇고 부드럽기 때문에 풀을 먹임으로써 베틀에서 직조가 가능하다. 베를 맬 때는 풀을 건조시킬 벳불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름에는 기온이 낮은 새벽에 주로 행한다. 꾸리 감기는 베의 씨실을 만드는 작업이다. 이 모든 과정이 완료되면 본격적인 베 짜기가 행해진다. 베를 짜기 위해서는 씨실을 넣은 북, 풀, 가위, 바늘, 물뿌리개, 기름, 최활, 푸심, 여분의 실이 필요하다. 베틀신을 신고 앞으로 밀고 뒤로 당기면서 명주를 짜는데, 두리실 명주 한 필은 40자[한자 54㎝]이다.

[안동 권씨 넷째 며느리 백문기 보유자의 삶과 무명 짜기]

백문기 보유자는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살다가 18세에 성주군 두리실 마을 안동 권씨 넷째 며느리가 되었다. 책 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하고 무남독녀로 귀하게 자랐던 그녀는 길쌈 잘하고 손이 야무졌던 시어머니와 3명의 큰동서와 함께 길쌈을 시작하였다. 손위 큰동서 강석경은 전승 공예 대전에서 베 짜기 장인으로 이름을 떨쳤고, 둘째 동서 조옥이[8살 위]는 일찍이 혼자가 되어 명주와 무명, 삼베 등으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동서의 틈에서 열심히 길쌈을 배웠다. 양반이자 학자였던 남편은 집안일을 도와주는 적이 없었다. 과수원에서 사과를 수확하면 목화를 심어 겨우내 무명을 짰다. 연중 쉴 틈 없이 길쌈을 한다고 하여 ‘애쌈’이라 부르기도 한다. 낮으로도 틈틈이 짜고 밤으로도 짜야 하는 고단한 베 짜기를 「베틀 노래」로 달래기도 한다.

“냇물 건너가서 쑥대밭을 쫓아내고/ 한쪽에는 뽕을심고 한쪽에는 목화심고/ 뽕잎이랑 누에치고 목화송이 솜을타서/ 고치고치 새고치를 오리오리 잦아내어/ 모슴모슴 뽑아내어 무명명주 짜내보세”[1995년 백문기 무명 짜기 기능 보유자가 직접 지은 노래]

“월궁에 노던선녀 인간세상 내려와서/ 사방을 둘러보니 옥난간이 비엿구나/ 옥난간에 베틀놓아 앞두다리 도아놓고/ 뒷다릴랑 낮게놓고 도투마리 얹어놓고/ 그름에다 잉애걸고 두루명주 짜내보세/ 안개속에 앉은품이 양귀비의 넋이로다/ 짚신일랑 발에걸고 북바디집 마주잡고/ 부티허리 두른양은 매봉재라 높은봉에/ 허리안개 두른듯이 휘영청 감돌았다/ 북이라 놓은양은 꾀꼬리가 둥지찾아/ 버들가지 넘나들듯 바디집 치는양은/ 해인사 절지을제 연목거는 소리로다/ [중략] 낮에짜면 일광단 밤에짜면 월광단/ 일광단 월광단 다짜가지고 앞냇물에 아시씨어/ 뒷냇물에 후야내어 서울가신 우리선보/ 도독한벌 지어서 줄대끝에 거러두고/ 나며보고 들며보고 서울갔던 선보님을/ 우리선보 안오시뇨 오기사 오던마는/ 칠성판에 실려오네”[『명주 짜기』에 수록된 백문기의 「베틀 노래」]

꼼꼼하고 야무진 성격은 무명 짜기에도 나타났다. 야무지게 짜야 하는 무명 짜기는 대충 해 버리면 얼기설기 고르지 못하고 상품으로서 가치도 없다. 촘촘하게 짜야 하기 때문에 눈썰미도 있어야 하고 꼼꼼해야 하며 근본적으로 성실해야 한다. 이러한 무명 짜기는 백문기의 성격과 닮았고, 식구들 옷에서 애들 한복, 이불까지 손수 만들어서 곱게 입혔다. 성실하고 부지런함으로 연간 5필 이상의 9~10새 무명을 짰으며, 1988년과 1989년 그리고 1998년 전승 공예 대전 직물 부분에서 입선과 장려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무명 짜기 과정]

무명 짜기 과정은 목화 재배와 수확-씨 앗기와 솜타기-고치말기-실잣기-무명 날기-베매기-베 짜기로 이루어진다. 4월 하순 곡우(穀雨)를 전후해서 씨를 뿌린 후 5월에 목화를 솎고 6월에 목화 순을 잘라 준 뒤 10월 초에 목화를 딴다. 수확한 목화는 11월 목화 고르기와 씨 앗기[씨를 분리해 면섬유를 채취하는 과정], 솜타기[뭉친 솜을 푸는 과정] 후 솜활을 퉁겨가며 솜을 부풀린다. 뭉게구름처럼 부푼 솜을 덜어내 손바닥으로 비비는데 이를 고치 말기라고 한다. 고치 말기가 끝나면 오른손으로 물레를 돌리고 왼손으로 고치를 잡아 알맞은 굵기의 실을 뽑아내는데 이를 실잣기라 한다.

무명 날기는 무명 한 필의 길이에 맞추어 길게 늘이는 과정이며, 베 짜기가 편하도록 풀을 먹인 날실을 베틀에 올려 매는 것을 베매기라 한다. 베매기까지 되면 베 짜기 준비가 완료되고 본격적으로 베틀에 앉아 베 짜기를 행한다. 무명은 짜는 과정에서 더러움이 타서 완성되면 물에 하룻밤 담가서 불린 후 방망이를 두드려 풀물을 빼는 과정을 여러 차례 행해야 한다. 이렇게 완성된 무명은 생목 또는 생면포라고 하며, 다시 잿물에 삶거나 쪄서 햇볕에 말리면 하얀 백목이 완성된다.

[명주 짜기와 무명 짜기의 전승 현황]

1991년 『한국 민속 종합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재래식 베틀을 활용하여 명주를 제직하는 곳이 경상북도 성주군에 한정되어 고려 시대 이후 전해지는 우리나라의 명주 기본 규격을 알기 어렵다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한국에 전해졌던 명주의 규격은 1929년 조선 박람회에 출품되었던 작품에 대한 일본인의 과학적 시험 조사 보고서만 전해지며, 전통 직물의 종류와 발굴과 조사 등이 필요함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두리실 마을에서는 길쌈보존회[회장 권병탁]를 조성하고 두리실 마을의 명주 짜기무명 짜기를 지키기 위한 노력을 행하였다. 1987년 결성된 길쌈보존회는 두리실 마을 내 길쌈 기술 보유자들에 대한 연구를 위하여 설립되었고, 명주 짜기무명 짜기의 무형 문화재 지정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약 20여 명의 회원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지며 길쌈보존회를 유지하고자 하였지만 이 역시 고령화와 인구 감소 등으로 활동이 미비한 상태이다.

특히, 명주 짜기무명 짜기 모두 기능 보유자의 사망[조옥이 보유자 2007년 사망]과 노환[백문기 보유자 2017년 이후 병원 요양] 등으로 전수 교육과 행사 등이 불가능하다. 각각의 전수 교육자[명주 짜기 이규종 전수 교육자, 무명 짜기 안옥란 전수 교육자] 또한 고령화로 인하여 명맥을 잇는 것 또한 힘겨운 상황이다.

이규종 전수 교육자는 조옥이와 백문기 보유자의 막내 동서로서 안동 권씨의 다섯 번째 며느리이다. 이규종 역시 75세를 훌쩍 넘긴 나이로 명주 짜기 전수 교육자로 활동하다가 2020년 명예 기능 보유자가 되었다. 이규종 전수 교육자는 고령의 나이에도 2015년 성주 명주를 알리기 위하여 ‘춘하추동 전통 명주’라는 주제로 서울 강남구 삼성동 중요 무형 문화재 전수 회관에서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하였지만, 2021년 현재 고령으로 활동이 어려운 상황이다.

무명 짜기 전수 교육자 안옥란은 백문기의 조카며느리로서 역시 안동 권씨 며느리이다. 1996년 12월 전수 교육자가 된 안옥란 역시 70대의 고령으로 많은 활동이 힘든 상황이다. 명주 짜기무명 짜기 모두 고령의 전수 교육자를 대신할 후계자가 없으며, 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 역시 드물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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