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271
한자 先史
영어공식명칭 Pre-historic Period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선사/석기,선사/청동기
집필자 김세기

[정의]

성주 지역 구석기 시대·신석기 시대·청동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

[구석기 시대]

성주 지역의 선사 시대는 이 지역에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구석기 시대부터 시작된다. 성주군 선남면관화리, 소학리, 취곡리성주읍 대황리의 지표 조사에서 구석기 유물이 출토된 바 있다. 성주군 일대는 낙동강이천(伊川), 백천(白川), 신천(新川) 등의 소하천 유역에 형성된 하안 단구상에 구석기 시대 문화층으로 알려진 신생대 제4기층이 잘 발달되어 있어 향후 구석기 시대 유적들이 더 발견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이다.

성주 지역에서 확인된 구석기 시대 유물을 구체적으로 보면 주먹 도끼, 찍개, 여러면 석기, 찌르개, 뚜르개, 새기개, 밀개, 긁개, 슴베찌르개, 좀돌날 몸돌, 홈날, 망치 등이다. 이 유물들은 대구광역시와 경상북도 지역의 대표적인 구석기 시대 유적인 상주 신상리 유적, 안동 마애리 유적, 김천 은기리 유적, 성주 관화리 유적, 대구 월성동 유적과 같이 대체로 중기 구석기와 후기 구석기 시대인 15만 년에서 3만 년 전의 유적들이다.

[신석기 시대]

우리나라는 구석기 시대가 지나고 기원전 6000년쯤부터 타제 석기에서 돌을 갈아 도구를 만드는 마제 석기를 사용하고, 밑이 뾰족하고 빗살무늬를 새겨 넣은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하는 신석기 시대가 시작된다. 그러나 2021년 기준 성주 지역에서는 아직까지 신석기 시대 유적이나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신석기 시대 유적은 대개 해안 지방이나 큰 하천 변의 퇴적 평야에서 주로 발견되는데 근래에는 경상북도 내륙 지방에서도 발견되며, 특히 성주군과 가까운 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송죽리에서 대규모 신석기 시대 취락지와 청동기 시대 취락지가 발굴 조사된 바 있다. 김천 송죽리 유적은 감천(甘川) 상류(上流)가 유자형으로 굽어지는 안쪽의 퇴적지에 형성된 유적이다. 이와 같은 자연적 입지는 성주 지역에도 여러 곳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성주 지역에 신석기 시대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은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청동기 시대]

신석기 시대에서 이어지는 청동기 시대는 고인돌과 무늬 없는 토기[무문 토기(無文土器)]로 대표된다. 빗살무늬 토기를 사용하는 토착 사회에 금속기인 청동 검과 청동 거울 등 선진 문물을 사용하는 이주민 집단에 의해 형성되는 시대로 대개 기원전 15세기쯤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성주 지역에서는 아직 청동기 시대 유적은 출토된 것이 없고 고인돌과 선돌[입석(立石)]이 중심 유적이다.

성주 지역에 분포한 고인돌은 모두 남방식 고인돌로 기반식과 개석식이 섞여 있다. 선남면 명포리 고인돌의 경우 큰 뚜껑돌 밑에 작은 고임돌 몇 개를 둘러놓은 위석식(圍石式)인데, 이것도 개석식이다. 또한 선돌 유적은 대체로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와 관련되어 경계 표시라고 하기도 하고 막연히 거석 기념물이라고 생각되었으나, 최근 대구 진천동 입석 발굴 결과 단순한 경계 표시가 아니라, 부락 공동체의 제의(祭儀) 장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 밝혀졌다. 성주 지역의 선돌은 대개 마을 입구 하천 변이나 논두렁, 밭둑에 세워져 있으며, 높이는 1.5m 정도의 소형이다.

우리나라는 청동기 시대에 금속기를 사용하며 농업 경제의 진전에 따라 사회 분화가 이루어졌다. 정복 전쟁이 전개됨에 따라 그 사회 안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일정하고 영속적인 계급성과 집단성을 띤 세력이 형성되었으며, 그런 세력에 의해 사회를 통괄하는 질서를 구축하기 위한 조직체인 국가가 성립되는 시기로 파악되고 있다. 이렇게 지배자 집단이 생기고 정치체가 형성된 중요한 증거를 청동기의 사용과 대형 고인돌의 축조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물론 대형 고인돌의 경우 개석의 무게가 70톤 혹은 150톤 정도 되는 대형인 경우 이를 축적하기 위하여 엄청난 인력이 동원되어야 하고 이런 고인돌의 주인공은 이를 역역(力役)으로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지배자로 볼 수 있다. 물론 소형 고인돌이라도 10톤 정도의 무거운 돌을 사용하고 이를 움직이려면 많은 부락민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인원 동원은 지배자 집단이기 때문이 아니라 부락의 공동체 의식으로 행해질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좁은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중소형 고인돌은 권력을 가진 지배자 집단의 분묘라기보다 고인돌이 분포된 지역에 어떤 세력이 집단을 이루고 있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성주 지역에 분포된 많은 고인돌도 그것이 모두 지배자의 분묘가 아니라 고인돌이 분포된 지역에 정치 세력이 형성되고 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는 자료가 되는 것이다.

[의의]

성주 지역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였으나 신석기 시대까지는 문화적 성격이 뚜렷하지 않다가 청동기 시대부터 집단을 이루며 큰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고인돌과 선돌을 통해 청동기 시대 성주 지역을 살펴보면, 수계에 따른 분지와 유역에 따라 이천 상류권(伊川上流圈), 이천 하류권(伊川下流圈), 백천 상류권(白川上流圈), 백천 중류권(白川中流圈), 백천 하류권(白川下流圈)[낙동강 연안(洛東江沿岸)] 및 대가천 상류권(大伽川上流圈)의 6개 생활권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이들 지역권의 상호 간 거리는 대개 하천 주변을 따라 10㎞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으며, 다만 대가천 상류권의 경우 15㎞ 이상 멀리 떨어져 있었다. 이들 세력권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외부로부터의 새로운 선진 기술이나 정치력 혹은 새로 이주해 오는 유이민 등에 의해 새로운 정치적 통합과 발전을 지속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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