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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767
한자 金燦基
영어공식명칭 Gim Changi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집필자 허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15년 5월 5일연표보기 - 김찬기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29년 - 김찬기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 입학
수학 시기/일시 1930년 - 김찬기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 제적
활동 시기/일시 1930년 1월 - 김찬기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 동맹 휴학 투쟁에 참가
활동 시기/일시 1930년 5월 19일 - 김찬기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원에서 징역 6월 집행 유예 5년 선고받음
활동 시기/일시 1936년~1937년 - 김찬기 대구와 경상북도 칠곡에서 비밀 결사 조직
활동 시기/일시 1938년 2월 - 김찬기 비밀 결사 조직이 발각되어 일제 경찰에 붙잡힘
활동 시기/일시 1941년 3월 - 김찬기 면소 처분을 받고 풀려남
활동 시기/일시 1943년 - 김찬기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연락하는 임무를 띠고 중국으로 출국
활동 시기/일시 1944년 11월 - 김찬기 중국 충칭에서 독립운동 활동
몰년 시기/일시 1945년 10월 10일연표보기 - 김찬기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0년연표보기 - 김찬기 건국 훈장 애족장 추서
출생지 김찬기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김찬기 이주지 - 경상남도 진주시
학교|수학지 진주고등학교 - 경상남도 진주시 의곡길 29[상봉동 987-1]
활동지 김찬기 활동지 - 대구광역시
활동지 김찬기 활동지 - 경상북도 칠곡군
활동지 김찬기 활동지 - 중국 충칭
묘소 국립 대전 현충원 - 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갑동 3]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정의]

일제 강점기 성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의성(義城).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1603]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어머니는 인동 장씨(仁同張氏)이다. 손후익(孫厚翼)의 딸 손응교(孫應喬)와 결혼하여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김환기(金煥基)는 형이다.

[활동 사항]

김찬기(金燦基)[1915~1945]는 1915년 5월 5일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리에서 3남 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나이에 고모가 있던 경상남도 진주로 이주하여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현 진주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1930년 1월 광주 학생 독립운동에 영향을 받아 일어난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의 동맹 휴학 투쟁에 참가하였다. 김찬기 등 동료 학생들이 진주농업학교, 진주도립사범학교, 진주제1공립보통학교를 순회하면서 격문을 뿌리며 시위를 벌였고, 시위 가담 학생들이 대거 붙잡혀 퇴학과 정학 처분을 받았다. 김찬기는 붙잡힌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일제 경찰을 조롱하는 격문 3,000여 매를 제작하여 학생들과 진주 일대에 배포하다가 체포되었다. 같은 해 5월 19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원에서 징역 6월 집행 유예 5년을 선고받았고, 학교에서는 제적되었다.

이후 김찬기는 대구로 옮겨 고서점을 운영하며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했고, 1934년 11월에 대구 일대에 뿌려진 격문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붙잡혔다가 풀려났다. 1936년~1937년에는 대구와 경상북도 칠곡에서 최소복(崔小福), 정칠성(鄭七星), 이영석(李寧錫), 이병기(李丙驥) 등을 만나 혁명적 농민 조합을 결성하고,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며, 나아가 조선의 독립을 목표로 하는 비밀 결사를 조직하였다. 비밀 결사는 먼저 농민의 권익을 옹호하고 의식을 고양하기 위해 일제가 관제 농민 운동의 일환으로 설립한 농촌진흥조합과 그 부속 야학회를 활용하여 농민 계몽 활동을 하며 동지 규합을 꾀하였다.

비밀 결사는 산하에 독서회도 조직하였다. 독서회는 일제 감시를 피하기 위해 친목계처럼 위장하여 대구, 경상북도 성주, 경상남도 합천, 울산 등에서 모임을 가졌다. 조선의 역사·어학·문학·사상 등을 학습하면서 민족의식을 키우고, 사회 과학 서적을 읽으며 사회 운동 및 혁명 이론을 익혀 계급 의식을 심화하였다. 또한 1937년 일제가 일으킨 중일 전쟁을 침략 전쟁으로 규정하고, 일제의 패전을 위해 후방을 교란하는 반전 반제 운동(反戰反帝運動)도 펼치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1938년 2월 무렵 비밀 결사 활동이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동지 30여 명과 함께 붙잡혔다가, 1941년 3월에 면소(免訴)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석방 후에는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의 광산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며 활동을 모색했고, 1943년 겨울 아버지 김창숙의 권유로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연락하는 임무를 띠고 중국으로 떠났다. 가는 도중 베이징[北京]에서 일제 관헌에 붙잡히기도 했으나 다시 탈출했고, 1944년 11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던 충칭[重慶]에 도착하여 독립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오랜 독립운동과 일제 관헌의 갖은 고문으로 쇠약해져 1945년 10월 10일 중국에서 사망하였다. 유해는 1945년 11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이 귀환할 때 한국으로 운구하였다.

[묘소]

묘소는 국립 대전 현충원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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