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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739
한자 鄭樟
영어공식명칭 Jeong Jang
이칭/별칭 직부(直夫),직보(直甫),사곡(沙谷),만오(晩悟)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69년연표보기 - 정장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8년 - 정장 빙고 별제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603년 - 정장 연기현감에서 파직
활동 시기/일시 1607년 - 정장 신녕현감으로 복직
활동 시기/일시 1612년 - 정장 증광시 문과에 급제
몰년 시기/일시 1614년연표보기 - 정장 사망
출생지 정장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1리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정장 이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지도보기
수학지 정장 수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동강한강로 9 지도보기
수학지 정장 수학지 -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용호리
부임|활동지 정장 부임지 - 서울특별시
부임|활동지 정장 부임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부임|활동지 정장 부임지 - 경상북도 영천시 신녕면
부임|활동지 정장 부임지 -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묘소|단소 정장 묘소 -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지도보기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청주
대표 관직 전라도도사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직부(直夫)·직보(直甫), 호는 사곡(沙谷)·만오(晩悟).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총(鄭摠)[1358~1397]의 7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정응상(鄭應祥)이고, 할아버지는 증 이조판서(贈吏曹判書) 정사중(鄭思中)이며, 아버지는 문목공(文穆公)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이다. 어머니는 광주 이씨(光州李氏)로 권지 훈련원 봉사(權知訓鍊院奉事) 이수(李樹)의 딸이다. 부인은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 조광익(曺光益)[1537~1580]의 딸 창녕 조씨(昌寧曺氏)이다.

[활동 사항]

정장(鄭樟)[1569~1614]은 1569년(선조 2)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 칠봉1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관직 진출은 큰아버지인 백곡(栢谷) 정곤수(鄭崑壽)[1538~1602]를 통해 이루어졌다. 선조(宣祖)가 사은 겸 변무 진주사(謝恩兼辨誣陳奏使)의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정곤수를 위해 그의 자제에게 관직을 제수하려 하자, 정곤수가 조카인 정장에게 벼슬을 제수해 줄 것을 청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정장은 정6품에 해당하는 빙고 별제(氷庫別提)를 시작으로, 사섬시 직장(司贍寺直長)·통례원 인의(通禮院引儀)·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연기현감(燕岐縣監) 등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게 되었다.

연기현감 직을 수행하다 물의를 일으켜 파직을 당한 뒤에는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1545~1609]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1607년(선조 40)에 이르러 신녕현감(新寧縣監)으로 복직하였다. 이후 1612년(광해군 4)에 증광시(增廣試) 문과에서 을과 5위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었으며, 곧이어 충청도도사(忠淸道道使)로 전보(轉補)되었으나 부임 전에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제수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라도도사(全羅道道使)에 부임하였는데, 이때 맏아들인 정유희(鄭惟熙)[1599~1620]가 관아에서 인쇄한 책을 부탁하자, ‘거관청신(居官淸愼)’ 네 글자로 아들을 깨우쳤다. 또한 이 무렵에 「통유호남열읍문(通諭湖南列邑文)」을 지어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의 신도비 건립에 적극 동참할 것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이렇듯 관리로서의 치도(治道)를 실현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다가 임기를 채우기도 전에 심각한 병에 걸려 고향인 성주로 돌아왔는데, 1614년(광해군 6) 10월에 46세의 나이로 아버지 정구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 때문에 당대 사람들은 정구정장의 관계를 공자(孔子)와 백어(伯魚), 주자(朱子)와 주숙(朱塾)에 빗대어 표현하기도 하였다.

[학문과 저술]

정장은 1583년(선조 16)에 관례(冠禮)를 올린 뒤, 아버지의 강학지소(講學之所)인 청천서재(晴川書齋)에서 정구의 문하생인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1550~1615],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1569~1634], 졸재(拙齋) 정추(鄭錘)[1573~1612] 등과 함께 강회(講會)에 참여하였다. 이처럼 정장은 어려서부터 아버지로부터 훈도를 받았으며, 자라서는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1540~1603]에게 나아가 학문의 요체를 배웠는데, 특히 역학(易學)과 문장(文章)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고 한다. 한편, 정구김우옹은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과 남명 조식의 학통을 동시에 이어받았던 인물들이다. 따라서 이들로부터 학문을 익힌 정장 역시 낙동강 연안에서 형성된 강안학(江岸學)을 충실히 계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연기현감(燕岐縣監)에서 파직된 1604년(선조 37)부터는 아버지 정구의 명으로 지산 조호익을 찾아가 글을 배웠는데, 이때 조경(曺瓊)[?~?], 이의잠(李宜潛)[1576~1635] 등과 교유하였다. 이후 1612년(광해군 4)에 마침내 대과에 급제한 정장은, 부끄럽지 않은 신하가 되기를 염원하며 평생토록 ‘거관청신(居官淸愼)’을 실천하고자 노력하였다. 저서로는 『만오선생문집(晩悟先生文集)』 2권 1책이 전하는데, 이는 1925년에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에 위치한 회연서원(檜淵書院)에서 간행한 것이다.

[묘소]

경상북도 성주군 대가면에 위치한 창평산(蒼坪山) 자좌(子坐) 언덕에 장사 지냈다가, 이후 원래의 묘 동쪽에 위치한 건좌(乾坐)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부인 창녕 조씨의 묘는 정장의 묘 오른쪽 임좌(壬坐)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원종훈(原從勳)으로서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추증되었다. 아버지 정구보다 먼저 죽었는데, 정구가 묘지(墓誌)인 「망자광기(亡子壙記)」를 지었다. 가장(家狀)은 7세손인 지애(芝厓) 정위(鄭煒)[1740~1811]가, 묘갈명(墓碣銘)은 묵헌(默軒) 이만운(李萬運)[1736~1820]이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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