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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736
한자 鄭藎
영어공식명칭 Jeong Sin
이칭/별칭 염조(念祖),백파(白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73년연표보기 - 정신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98년 - 정신 식년 생원시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16년 - 정신 식년시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17년 - 정신 성균관 전적·예조좌랑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18년 - 정신 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20년 - 정신 현풍현감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27년 - 정신 사간원 정언·사헌부 장령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30년 - 정신 사간원 헌납·사간원 사간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34년 - 정신 사헌부 집의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36년 - 정신 홍문관 부수찬·문신 겸 선전관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38년 - 정신 사간원 사간·홍문관 부교리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39년 - 정신 사헌부 집의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41년 - 정신 홍문관 교리에 제수
출생지 정신 출생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갖말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정신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갖말
수학지 정신 수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갖말
부임|활동지 정신 부임지 - 서울특별시
부임|활동지 정신 부임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청주
대표 관직 홍문관 교리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문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염조(念祖), 호는 백파(白坡).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7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정복흠(鄭復欽)이고, 할아버지는 정달제(鄭達濟)이며, 아버지는 정동섭(鄭東燮)이다. 어머니는 의성 김씨(義城金氏)로 김여창(金汝昶)의 딸이다. 부인 양주 조씨(楊州趙氏)는 조정규(趙貞逵)[1755~?]의 딸이다. 홍경래(洪景來)[1771~1812]의 난 때 가산(嘉山)에서 순절한 창파(蒼坡) 정로(鄭魯)[1751~1811]가 바로 그의 형이다.

[활동 사항]

정신(鄭藎)[1773~?]은 1773년(영조 49)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의 갖말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1798년(정조 22)에 식년 생원시에, 그리고 1816년(순조 16)에는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후 1817년(순조 17)부터 1830년(순조 30)까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예조좌랑(禮曹佐郞)·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현풍현감(玄風縣監) 등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또한 1830년에는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에 부임하였는데, 이때 효명 세자(孝明世子)[1809~1830, 헌종의 아버지]가 각혈(喀血)을 하다 며칠 만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자, 치료에 관여하였던 내의원 제조(內醫院提調) 홍기섭(洪起燮)[1776~1831] 등의 처벌을 건의하였지만, 윤허를 받지는 못하였다.

1836년(헌종 2)에는 『홍문록(弘文錄)』[홍문관 관원을 선정할 때 작성하는 인선 기록]에 이름이 올랐으며, 이동적(李東迪)[1769~1843] 등과 함께 높은 점수를 받아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에 제수되었다. 이후 1839년(헌종 5)에는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에, 1841년(헌종 7)에는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부임하였다.

정신은 특히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활약했던 귀화인들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1834년(순조 34)에 명나라 귀화인인 시문용(施文用)[1572~1643]과 서학(徐鶴)[1566~1646]을 기리기 위해 성주군 용암면에 풍천재(風泉齋)가 세워지자 이에 대한 기문을 지은 바 있으며, 1842년(헌종 8)에 일본 귀화인인 김충선(金忠善)[1571~1642]의 문집 『모하당문집(慕夏堂文集)』이 중간(重刊)되자 직접 서문(序文)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풍천재기(風泉齋記)」 가운데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러 갔던 종선조(從先祖) 백곡(栢谷) 정곤수(鄭崑壽)[1538~1602]에 대한 기록이 들어가 있다는 것인데, 이를 통해 그가 지닌 숭조(崇祖) 의식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겠다.

한편 정신은 소과(小科) 가운데 유교 경전에 대한 지식을 시험하는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또한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1799년(정조 23) 4월에는 전강(殿講)[경서(經書)의 강독을 장려하기 위하여 실시한 시험]에서 이교신(李敎信)[1770~?]·이기준(李麒峻)[1758~?]·한윤진(韓允鎭)[1754~?]·임수익(任壽益)[1762~?]·김석현(金碩鉉)[1747~?]·김주묵(金周默)[1777~?] 등과 함께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종이 두 권을 하사받았다. 이후 1803년(순조 3)에 있었던 전강에서는 오하철(吳夏哲)[1783~?]과 함께 회시(會試)에 곧바로 응시할 자격을 부여받기도 하였다. 이는 정신이 경서의 강독에 매우 능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들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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