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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735
한자 鄭蓍
영어공식명칭 Jeong Si
이칭/별칭 덕원(德園),백우(伯友),충렬(忠烈)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황명환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68년연표보기 - 정시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96년 - 정시 무남(武南)으로 천거
활동 시기/일시 1799년 - 정시 내시사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804년 - 정시 무신 겸 선전관으로 부임
활동 시기/일시 1807년 - 정시 훈련원 주부로 승진
활동 시기/일시 1810년 - 정시 도총부 경력으로 부임
활동 시기/일시 1811년 - 정시 가산군수로 부임
몰년 시기/일시 1811년연표보기 - 정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812년 - 정시 충렬로 추시
추모 시기/일시 1824년 - 정시 표절사에 합향
출생지 정시 출생지 - 경상북도 구미시
거주|이주지 정시 거주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갖말 지도보기
수학지 정시 수학지 -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 갖말
외가|처가 정시 외가 - 경상북도 구미시
부임|활동지 정시 부임지 - 서울특별시
부임|활동지 정시 부임지 - 평안북도 박천군 가산면
묘소|단소 정시 묘소 -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무계리
사당|배향지 표절사 - 평안북도 정주군 마산면 신오동
성격 무신
성별
본관 청주
대표 관직 도총부 경력|가산군수

[정의]

조선 후기 성주 출신의 무신.

[가계]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덕원(德園), 호는 백우(伯友).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8세손으로, 증조할아버지는 정달제(鄭達濟)이고, 할아버지는 정동섭(鄭東燮)이며, 아버지는 창파(蒼坡) 정로(鄭魯)[1751~1811]이다. 어머니는 함양 박씨(咸陽朴氏)로 박사우(朴思禹)의 딸이다. 부인 일선 김씨(一善金氏)는 김양화(金養和)[1740~?]의 딸인데, 후사가 없어서 사후에 재종질(再從姪) 정주석(鄭冑錫)[1791~?]으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였다.

[활동 사항]

정시(鄭蓍)[1768~1811]는 외가인 선산(善山)[현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태어나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수성리의 갖말에서 성장하였다. 정시는 어렸을 때부터 이미 어른스러운 풍모가 있었으며 키가 크고 다부져 건장한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정시가 관직에 진출하기 전, 아버지 정로는 그에게 무예로 공을 세우는 것 또한 장부의 일이라고 하면서 무예에 종사할 것을 격려하였다. 이후 그는 1796년(정조 20)에 음직으로 천거되었으며, 1799년(정조 23)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1804년(순조 4)에는 무신 겸 선전관(武臣兼宣傳官)으로 임명되었고, 1807년(순조 7)에는 훈련원 주부(訓鍊院主簿)로 승진하였으며, 1810년(순조 10)에는 도총부 경력(都摠府經歷)으로 옮겼다. 그는 일찍이 도성에 있을 때 항상 지방 고을을 다스리면서 어버이를 모실 것을 원하였다. 그리하여 1811년(순조 11) 가을에 가산군수(嘉山郡守)로 부임하게 되자, 아버지 정로를 모시고 임지로 나아갔는데, 이때 어머니를 모셔 오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관아의 주방에 음식 수를 줄일 것을 명하였다고 한다.

정시가 가산군수로 부임하였을 때, 서쪽 변방에서 홍경래(洪景來)[1771~1812]가 난을 일으켰으나, 당시 관아의 포졸들은 무기를 지닌 채 모두 달아나 버렸다. 이에 정시는 아우인 정질(鄭耋)[1781~?]과 함께 마을을 순찰하며 백성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타이른 뒤, 관아로 돌아와 아버지 정로를 피신시키고자 하였는데 정로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얼마 후, 적들이 일제히 쳐들어와 투항을 강요하자, 정시 부자(父子)는 한 목소리로 크게 적들을 꾸짖었다. 이에 적들은 가산군수인 정시를 끌어내리며 칼로 두 다리를 치고, 손에 든 병부(兵符)를 빼앗기 위해 양팔을 잘라 그를 죽였다. 이어서 적의 칼날은 정로에게까지 미쳤으며, 아우 정질 또한 상처를 입어 죽을 뻔하였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묘소]

묘소는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무계리에 있다. 정시의 묘소 위쪽에 아버지 정로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상훈과 추모]

1812년(순조 12)에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추증된 뒤,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더해졌다. 이어서 지평(持平) 박승현(朴升鉉)[1778~1835]의 요청에 따라 시장(諡狀)[임금에게 시호 하사를 건의하면서 해당 인물의 행적을 적어 올린 글]을 기다리지 않고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824년(순조 24)에는 장령(掌令) 박영현(朴榮顯)의 상소로 평안북도 정주군에 위치한 표절사(表節祠)에 홍경래의 난 때 순절한 다른 6명의 의사(義士)와 함께 배향되었다.

또한 강재(剛齋) 송치규(宋穉圭)[1759~1838]가 묘표(墓表)를 찬하였고,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1774~1842]가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으며, 매산(梅山) 홍직필(洪直弼)[1776~1852]이 묘지명(墓誌銘)을 작성하였다. 1930년에는 후손인 정두용(鄭斗容)·정오영(鄭五永) 등이 『가산순절록(嘉山殉節錄)』 7권 3책을 간행하여 정시정로의 순절 사실을 기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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