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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농민 항쟁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400318
한자 癸未農民抗爭
영어공식명칭 1883 Years Peasant Uprising
이칭/별칭 1883년 성주 민란,계미 농민 항쟁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경상북도 성주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권대웅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883년 - 1883년 농민 항쟁 발생, 읍폐 교구를 내세워 이방의 교체를 요구
종결 시기/일시 1883년 6월 28일 - 1883년 농민 항쟁 종결, 감영에서 군사 파견, 정부에서 안핵사 파견
발단 시기/일시 1883년 6월 12일 - 1883년 농민 항쟁, 군중 대회를 열어 읍폐를 폭로하며 서리의 교체를 요구
전개 시기/일시 1883년 6월 25일 - 1883년 농민 항쟁, 재봉기를 알리는 통문을 돌리고, 무장 농민들이 성주목사를 읍의 경계 밖으로 축출
발생|시작 장소 성주 성밖숲 - 경상북도 성주군 지도보기
종결 장소 성주목 교장 - 경상북도 성주군
성격 농민 항쟁|사회 운동
관련 인물/단체 정중집|최병굉|배장한|이용준|이득석|최병규|이지호

[정의]

1883년 경상북도 성주에서 일어난 농민 항쟁.

[개설]

1883년 농민 항쟁은 1883년 6월 12일 성주 지역의 농민들이 이방 배장한(裵章翰)의 탄핵을 요구하며 일으킨 농민 항쟁이다. 사족들이 봉건적 특권을 장악하기 위해 향청을 통해 추천한 배장한을 성주목사 이용준(李容準)이 이방으로 임명했기 때문에 일어난 항쟁이었고, 1862년 성주 농민 항쟁을 계승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성주목사의 기만적인 수습책에 속아 해산했다가 6월 25일 다시 봉기하여 이교(吏校)의 집을 파괴하고 성주목사를 읍의 경계 밖으로 축출하였다. 조정에서는 안핵사를 파견하여 주동자를 체포하여 효수하고 가담자를 처벌하였다.

[역사적 배경]

1880년 신임 성주목사 이용준이 향청에서 사족들이 추천한 배장한을 이방에 임명하였다. 이에 지역 농민들은 사족들이 향청을 통해 행사하는 이방 추천권을 혁파하고 이방 선임권을 장악하고자 했고, 1883년 봄부터 이방의 교체를 선동하거나 탄핵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경과]

경상북도 성주 지역의 농민 항쟁은 1883년 6월 12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883년 봄부터 읍폐 교구(邑幣矯捄)를 내세워 이방의 교체를 선동하는 익명의 통문(通文)이 성주 일원에 살포되는 한편, 감영에도 이방의 탄핵을 요구하는 정문(呈文)이 제출되었다. 이후 6월까지 통문과 정문을 통한 선동은 여러 차례 계속되었다.

사족들은 농민들의 동향에 신속히 대처하고자 했고, 이방 배장한은 목사의 밀명을 받아 유향소와 협력하여 주모자로 지목된 정중집(鄭仲執)을 체포하였다. 이에 농민 수백 명과 지도자 최병굉(崔炳宏)이 향청을 공격하여 정중집을 구출했고, 정중집은 즉각 통문을 살포하고 읍에서 10여 리[약 4㎞] 떨어진 유목정(柳木亭)에서 군중 대회를 개최하였다. 군중 대회에서는 읍폐의 폭로와 함께, 서리 교체가 관철될 때까지 계속 투쟁하기로 하였다. 6월 12일이었다.

순영(巡營)에서는 무력 진압과 기만적인 교구책으로 민란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우선 군사를 파견하여 정중집과 최병굉을 체포하는 한편, 사관(査官)을 파견하여 결가(結價)를 인하하는 등 읍폐 교구책을 취하였다. 농민들은 농성을 풀지 않고 계속해서 이방 선임권을 요구하였다. 성주목사 이용준은 배장한을 물러나게 하고 농민들의 요구대로 이득석을 이방으로 임명하였다. 농민들이 농성을 풀고 해산하자, 이방 이득석과 민란을 주도했던 최병규(崔炳奎)·이지호(李志浩) 등을 체포하였다.

이에 6월 25일 재봉기를 알리는 통문이 살포되었다. 무장한 농민들은 읍내로 진입하여 이교의 집 일곱 호를 파괴하고, 성주목사에게 지도자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튿날 농민들은 무력으로 관아를 점령하여 구금된 지도자를 구출하는 한편, 성주목사를 읍의 경계 밖으로 축출하였다. 6월 28일, 이 사실이 감영(監營)에 보고되었다.

[결과]

감영에서 군사를 급파하여 봉기를 진압하는 한편, 조정에서는 안동부사 조병호(趙秉鎬)를 안핵사로 보내어 사실을 조사하고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난을 주도한 수창자 정중집 등 4명을 체포하여 성주목 교장(校場)에서 효수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경중을 구분하여 처벌하였다.

김용발(金用發)·이금술(李今述)·이상이(李尙伊)·박성관(朴性寬)·이원정(李源正)은 엄형 2차 후에 원악도(遠惡島)에 정배하고, 이성유(李性有)·이순서(李順瑞)·이계명(李啓明)·두치서(杜致瑞)·시소일(施素一)은 엄형 1차 후에 원지(遠地)에 정배하였다. 이하수(李夏秀) 이하 14명과 도윤조(都閏祚) 등은 도(道)에서 등급을 나누어 귀양을 보내고, 박이인(朴以仁) 등 21명은 징계하여 석방하였다. 한편, 관장을 보살핀 전 호장(戶長) 도한구(都漢求), 수교(首校) 배성우(裵成祐) 등에게는 목(牧)에서 상을 내렸고, 목사 이용준은 공적을 생각하여 연임하게 하였다.

[의의와 평가]

1883년 농민 항쟁1862년 농민 항쟁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농민층의 개혁 운동이었다. 성주의 1862년 농민 항쟁은 개별적이고 분산적이던 농민들의 부세 저항이 집단적인 부세 개혁 운동으로 발전했고, 또한 소·빈농층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개혁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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