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900470
이칭/별칭 금곡릉,金谷陵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능묘
지역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금곡동 437]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민규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851년 - 명성황후 출생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852년 - 고종 출생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872년 - 순명효황후 출생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874년 - 순종 출생
피장자 생년 시기/일시 1894년 - 순정효황후 출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895년 - 명성황후 사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904년 - 순명효황후 사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919년 - 고종 사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926년 - 순종 사망
피장자 몰년 시기/일시 1966년 - 순정효황후 사망
문화재 지정 일시 1970년 5월 26일연표보기 - 남양주 홍릉과 유릉 사적 제207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남양주 홍릉과 유릉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사적 지정 번호 삭제
현 소재지 남양주 홍릉과 유릉 -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로 352-1[금곡동 437]지도보기
성격
양식 동봉삼실형[유릉]|개석방부[표석]
관련 인물 고종|명성황후|순종|순명효황후|순정효황후

[정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대한제국 고종과 명성황후, 순종과 순명효황후·순정효황후의 능.

[개설]

남양주(南楊州) 홍릉(洪陵)과 유릉(裕陵)은 조선 제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 고종(高宗)[1852~1919]과 명성황후(明成皇后)[1851~1895]를 안장한 홍릉, 조선 제27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2대 황제 순종(純宗)[1874~1926]과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1872~1904]·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1894~1966]를 안장한 유릉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남양주 홍릉과 유릉은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7호로 지정되었다. 이후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보호법시행령」 고시에 따라 지정 번호가 삭제되었다.

[위치]

남양주 홍릉과 유릉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437번지에 있다.

[변천]

1895년 8월 을미사변(乙未事變)으로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의 습격을 받아 시신이 불태워졌다. 고종은 10월 태원전(泰元殿)에 빈전(殯殿)을 설치하고, 숭릉(崇陵)[현 구리시 동구릉 내] 오른쪽 언덕에 숙릉(肅陵)을 조영하였으나 능지 풍수가 좋지 못하다고 하여 인산(因山)하지 못하고, 1897년 청량리[현 서울시 동대문구 국립산림과학원]에 능지를 정한 뒤 능호를 ‘홍릉(洪陵)’으로 바꾸고 10월 28일 하관(下棺)하였다. 명성황후의 홍릉은 1900년 양주 금곡[현 남양주시 금곡동]으로 옮기려 하였으나 1902년 정지되었으며, 1919년 고종이 승하하자 금곡의 을좌신향(乙坐辛向)에 고종의 능을 조성하며, 명성황후의 능을 옮겨 왔다.

유릉은 1905년 태자비(太子妃)였던 순명효황후가 사망하여 용마산(龍馬山) 내동(內洞)[현 서울시 광진구 능동]에 유강원(裕康園)이 조영되면서 시작되었다. 1907년 순종이 왕위에 오르자 유강원은 유릉으로 추숭되었으며, 1926년 순종이 사망하자 홍릉 뒤편으로 옮기고 순종과 순명효황후를 합장하였다. 1966년 순정효황후가 합장되면서 유릉 조영이 완료되었다.

[형태]

고종과 명성황후의 합장릉인 홍릉의 봉분은 단릉(單陵)으로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이 둘러져 있으며, 봉분 뒤로 곡장(曲墻)이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이 있다. 홍릉은 황릉(皇陵) 체제로 조영되어 정자각(丁字閣) 대신 침전(寢殿)이 능강 아래에 있으며, 기타 석물들은 침전 앞 좌우에 건립되어 있다. 침전 앞 석물들은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석기린(石麒麟) 1쌍, 석상(石象) 1쌍, 석사자(石師子) 1쌍, 석해치(石獬豸) 1쌍, 석낙타(石駱駝) 1쌍, 석마(石馬) 2쌍이 있다. 홍릉 침전 앞에 비각이 있으며, 재실 중 내재실(內齋室)은 침전 서쪽에 있으며, 어재실(御齋室), 예재실(睿齋室)은 유릉 앞에 있다. 또한 홍릉에는 수라간(水刺間), 수복방(守僕房) 등 건축물과 어정(御井) 등이 남아 있다.

유릉은 하나의 봉분 아래 순종과 두 황후가 합장된 동봉삼실형(同封三室形)이라는 유일한 체제의 조선 왕릉이다. 유릉홍릉과 마찬가지로 황릉의 체제로 조영되었다. 그래서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른 봉분에는 곡장, 상석, 망주석, 장명등이 건립되어 있으며, 침전 앞에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석기린 1쌍, 석상 1쌍, 석사자 1쌍, 석해치 1쌍, 석낙타 1쌍, 석마 2쌍이 있다. 유릉의 건축물로는 침전, 비각, 수복방, 수라간이 있으며, 재실은 홍릉 재실을 함께 사용하였다.

[금석문]

남양주 홍릉과 유릉홍릉 표석은 개석방부 형태로 1922년 건립되었으며, 앞면에 ‘대한 고종태황제홍릉 명성태황후부좌(大韓 高宗太皇帝洪陵 明成太皇后祔左)’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에 음기(陰記)는 없다. 유릉 표석은 개석방부 형태로 1968년 건립되었으며, 앞면에 ‘순종효황제유릉 순명효황후부좌 순정효황후부우(純宗孝皇帝裕陵 純明孝皇后祔左 純貞孝皇后祔右)’라고 새겨져 있고, 옆면에 ‘대한(大韓)’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순종과 순명효황후·순정효황후의 생몰년 및 안장 일자가 새겨져 있다.

[의의와 평가]

남양주 홍릉과 유릉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황릉 제도를 반영한 사례이다. 정자각 대신 침전을 건립하고, 봉분 앞에 있던 석인상을 침전 앞으로 옮기고, 기린, 코끼리, 사자, 해치, 낙타 등 서수(瑞獸)를 배치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러한 변화는 조선 왕릉의 전통과 20세기 초 문화 성향이 융합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병풍석, 망주석, 장명등 등 기존 조선 왕릉 석물과 동일한 작품은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 반면에 유릉 침전 앞 석물의 경우 일본인 조각가 아이바 히코지로[相羽彦次郞]가 서양의 해부학적인 인체 구조를 바탕으로 한 사실주의 기법으로 만들었다.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소조 모형을 먼저 제작한 뒤 석재로 다시 제작하는 방법을 따랐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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