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1112
한자 改新敎
영어공식명칭 Protestantism
이칭/별칭 프로테스탄트,신교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신재식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독교의 한 분파.

[개설]

개신교(改新敎)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 기원한 그리스도교의 한 지파로 16세기 종교개혁 때 성립되었다. 개신교는 인간의 행위가 아닌 믿음을 통한 구원을 중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인류에 대한 보편적 사랑의 실천을 중시한다. 16세기 이후로 그리스도교의 대표적 지파가 된다. 18세기 이후로 아시아 등으로 확산되고, 1880년대 이후 우리나라에 소개된다.

밀양 개신교 역사의 시작은 최경수가 1897년에 설립한 춘화교회이다. 초기 밀양의 개신교는 근대 교육을 실시하거나 독립운동가를 배출하는 등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일제의 침탈이 심화되자 일부 세력이 신사참배 등 일제의 정책에 협력하기도 한다. 이로 인하여 한국이 독립하자 밀양의 장로교단은 고신파(高神派)와 통합파로 분열된다.

[개항기 밀양 지역의 개신교]

한국의 개신교 유입은 주로 두 가지 경로로 성사되었다. 하나는 1880년대 이전에 중국과 만주에서 의주 등 북방을 통하여 유입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1880년대 이후 홍콩과 일본에서 부산 등 남방을 통하여 유입된 것이다.

당시 선교사 존 월푸(John R. Wolfe)[1832~1915], 제임스 스카트 게일(James Scarth Gale)[1863~1937], 메리 데이비스(Mary T. Davies)[1853~1891], 윌리엄 베어드(W. M. Baird)[1862~1931], 휴 브라운(H. M. Brown)[1867~1896], 제임스 아담스(James S. Adams)[1867~1929] 등이 부산과 경상남도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이어 호주 장로교 소속의 선교사들이 활발히 활동하였다. 선교사들은 선교뿐만 아니라 학교, 병원, 고아원 등을 설립하여 다양한 공익사업을 주관하였다.

밀양 지역 초기 개신교 역사[1897~1906]의 시작은 1893년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로부터 비롯된다.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는 밀양 최초의 선교 활동을 시작한 인물이다. 1897년 최경수가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춘화리에 밀양 최초의 교회인 춘화교회를 설립하였다. 이어 1904년부터 양효교회 등 수많은 교회가 설립되어 지역 포교와 근대 교육에 기여하였다.

[일제 강점기 밀양 지역의 개신교]

일제강점기 식민지 정책에는 종교도 포함된다. 일본 제국주의는 종교를 자국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였다. 일제 개신교 계통을 정리하면 1904년 부산일본기독교회, 1906년 성공회, 1913년 일본 감리회 교파, 1920년 구세군 등으로 정리된다.

한편 밀양 지역 개신교 일각에서는 한국 독립 단체 중 하나인 의열단(義烈團) 단원이 대거 배출되었다. 밀양 출신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1898~1958]의 아내인 박차정(朴次貞)[1910~1944]이 교회 전도사 박문희(朴文熺)의 동생이고, 고인덕(高仁德)[1887~1926]도 밀양교회 설립자 고삼종(高三宗)의 아들이다. 그 밖에도 수많은 단원이 개신교 출신이었다. 또한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춘화리 개신교 신자인 김영환(金英煥), 김성수(金聖壽), 김응진(金應振), 김응삼(金應三) 등이 3·1운동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이는 다른 지역 교회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밀양 지역 개신교의 특성이다.

1930년대 이후 일제는 개신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일제 군부는 만주사변 이래로 군사적 침략 전쟁과 문화적 동화 정책을 강화하면서 식민지 국민에게 천황을 현신화한 종교인 신도(神道)를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의 선교사와 교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외국인 선교사를 해외로 추방하고, 교회를 폐쇄하고, 목사와 신자를 투옥시키거나 순교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과정에서 일제 개신교 계통은 일제에 협조하고, 서구 개신교 계통은 일제에 저항하였다. 밀양 지역 개신교 교회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광복 이후 밀양 지역의 개신교]

광복 이후 개신교 재건의 핵심 문제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의 청산이었다. 이로 인하여 장로교단은 일제의 신사참배에 저항한 고신파(高神派)와 그렇지 않은 통합파로 분열되었다. 밀양 지역 장로교단의 사정도 마찬가지여서 신사참배에 협조한 지도자 집단이 도리어 주도권을 잡는 현상이 일어나면서 장로교단이 분열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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