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708
한자 義烈團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조형열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설립 시기/일시 1919년 11월연표보기 - 의열단 설립
성격 독립운동 단체

[정의]

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주축이 되어 활동한 항일 단체.

[설립 목적]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김원봉, 윤세주, 김상윤 등 밀양 출신 인사들은 만주의 지린[길림(吉林)]에서 민족 독립을 위하여 헌신하겠다는 맹세를 하며 의열단을 발족하였다. 의열단김원봉을 의백, 즉 단장으로 추대하고 조선 독립과 세계 평등을 위하여 조선 총독 이하 고관 등을 ‘7가살(可殺)’ 암살 대상으로 삼았고, 조선총독부 및 일제 수탈기관 등을 ‘5파괴’ 기구로 규정하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1920년 3월부터 윤세주, 곽재기 등 핵심 대원들을 국내에 잠입시켰고, 상하이에서 폭탄과 권총을 구입한 뒤 국내로 운반하여 밀양의 김병환 집에 숨겨 놓았으나 마지막 실행 단계에서 발각되어 26명의 관계자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9월 14일 박재혁을 파견하여 부산경찰서를 공격했고, 12월 27일에는 최수봉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1921년 9월 12일에는 김원봉으로부터 폭탄 2개와 권총을 건네받은 김익상이 조선총독부 청사로 잠입하여 의거를 일으켰다. 1922년 3월 28일에는 중국 상하이 황푸탄[黃浦灘]에서 오성륜, 김익상, 이종암 등이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를 저격하였다. 김상옥은 1923년 1월 12일 서울 종로경찰서에, 김지섭은 1924년 1월 5일에 일본 왕궁의 이중교(二重橋)에 폭탄을 던졌다.

의열단의 의열 투쟁에 대한 의지는 신채호에 의뢰하여 1923년 1월 작성·발표한 「조선혁명선언」에 담겼다. 민중에 기반하여 오직 폭력에 의한 투쟁만이 유효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25년 이후 의열단의 투쟁 방향은 군대 양성을 바탕으로 한 조직적 무장투쟁과 대중운동의 준비로 옮겨갔다. 이에 따라 중국 광주로 활동 근거지를 옮기고 1926년에 핵심 단원들이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하면서 암살·파괴 운동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의열단 단원 나석주가 1926년 12월 28일 김창숙·이동녕·김구의 지시를 받고 신채호로부터 폭탄을 수령하여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지점에 폭탄을 던진 의거를 일으켰지만, 의열단은 1930년대 이후 조선혁명간부학교 개설, 조선민족혁명당 결성, 조선의용대 조직 등 민족 통일전선 운동과 무장 독립운동에 힘을 쏟았다.

[의의와 평가]

의열 투쟁의 상징적 존재로서 조선 독립운동의 발전을 이끌었으며, 민족 혁명의 길을 모색하고 무장투쟁을 전파하는 데 의열단이 크게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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