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643
한자 盧相益
영어공식명칭 Noh Sangik
이칭/별칭 치삼(致三),대눌(大訥),모헌(某軒)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하유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49년 11월 12일연표보기 - 노상익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82년 - 노상익 별시 문과 을과에 급제
활동 시기/일시 1911년 - 노상익 중국 서간도 안동현으로 망명
몰년 시기/일시 1941년 9월 16일연표보기 - 노상익 사망
추모 시기/일시 2017년연표보기 - 노상익 대통령 표창 추서
출생지 금곡리 - 경상남도 김해군 생림면 금곡리
거주|이주지 밀양 - 경상남도 밀양군
거주|이주지 금곡리 - 경상남도 김해군 생림면 금곡리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산41-2 외]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권지승문원부정사|성균관전적|사헌부지평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노상익(盧相益)[1849~1941]의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치삼(致三), 호는 대눌(大訥), 모헌(某軒)이고, 동생은 소눌 노상직이다. 1849년 11월 12일 경상남도 김해군 생림면 금곡에서 아버지 노필연과 어머니 창녕성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부인은 안진중의 딸 광주안씨로 슬하에 2녀를 두었다가, 노상직의 아들 노식용을 후사로 들였으며 늦게 2남을 두었다.

[활동 사항]

노상익은 1846년 16세 때 김해부사 성재 허전[1797~1886]의 문인이 되었다. 1882년 별시 문과 을과에 급제하고, 권지승문원부정사,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이 시행되자 김해로 낙향하였다. 이후 밀양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노상익은 1905년 홍문관시강에 제수되었으나 경연을 열 것을 청하는 소를 올린 후 밀양으로 낙향하였다. 1906년 2월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어 헌병대에 의하여 영남루에 구금되었으며, 1910년에는 일제의 은사금을 거부하여 재차 구금되었다.

1911년 압록강 너머 서간도 안동현으로 망명하였다. 1913년 동삼성 한인공교회의 유교 개혁 운동에 동참하였으며 군자금 모집 관련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4년과 1922년에 일제로부터 군자금 모집 관련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었다.

1922년 74세에 귀국하여 김해 금곡에 천산재를 짓고 은거하였다. 1941년 9월 16일 93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저술 및 작품]

노상익이 간행한 『대눌수권(大訥手卷)』, 필사본 『대눌수권속편』, 『학정계안』, 『유손수지』, 『소학고의』, 『동제고략』, 『통사절요』, 『동방국계고』 등 약 30여 책이 전해진다.

[묘소]

노상익은 1942년 3월 유림장으로 금곡 천산재 뒷산 축좌 언덕에 장사지냈으며, 2019년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2017년 대통령 표창에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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