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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702
한자 尹世復
영어공식명칭 Yoon Sebok
이칭/별칭 윤세린(尹世麟),단애(檀崖),상원(庠元),허당(虛堂)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무연리 318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강정원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1년 3월 29일연표보기 - 윤세복 출생
수학 시기/일시 1886년 - 윤세복 응천제에서 한학 수학
활동 시기/일시 1909년 - 윤세복 대동청년당 결성
활동 시기/일시 1910년 12월 - 윤세복 대종교 입교
활동 시기/일시 1911년 1월 29일 - 윤세복 시교사에 입명
활동 시기/일시 1911년 2월 - 윤세복 만주 환인현으로 이전
활동 시기/일시 1916년 - 윤세복 무송현 등에 교당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19년 2월 - 윤세복 「대한독립선언서」에 민족 대표로 서명
활동 시기/일시 1922년 6월 5일 - 윤세복 전리로 승진
활동 시기/일시 1924년 - 윤세복 전리로 승진 대종교 제3대 교주에 취임
활동 시기/일시 1928년 - 윤세복 대종교 총본사 밀산당벽진으로 이전
활동 시기/일시 1934년 - 윤세복 하얼빈시 안평가에 대종교 선교회 설치
활동 시기/일시 1939년 10월 25일 - 윤세복 교적 간행위원회 설립
활동 시기/일시 1941년 6월 - 윤세복 『홍범규재』, 『삼일신고』, 『신단실기』 간행
활동 시기/일시 1941년 - 윤세복 『종례총략』, 『오대종지 강연』, 『종문지남』 간행
활동 시기/일시 1942년 - 윤세복 무기 징역형 선고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윤세복 출옥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윤세복 서울에 대종교 총본사 설치
활동 시기/일시 1957년 - 윤세복 『종사취재고』 찬술
몰년 시기/일시 1960년 2월 13일연표보기 - 윤세복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62년 3월 1일연표보기 - 윤세복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추모 시기/일시 2000년 11월 3일 - 윤세복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역에 안장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28년 - 윤세복 일본 군부 대종교 금지령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30년 - 윤세복 대종교 해금
관련 사건 시기/일시 1931년 - 윤세복 대종교 동·서·북도본사 해체
출생지 윤세복 출생지 -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무연리 318 지도보기
거주|이주지 윤세복 이주지 - 중국 만주 봉천성 환인현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 서울특별시 동작구 현충로 210[동작동 산41-2]
성격 종교인|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대종교 교주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밀양 출신의 종교인.

[가계]

윤세복(尹世復)[1881~1960]의 본관은 무송(茂松), 호는 단애(檀崖), 자는 상원(庠元)이며, 본명은 윤세린(尹世麟)이다. 1881년 3월 29일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무연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윤세복(尹世復)은 1886년 경상남도 밀양에 있는 응천제라는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이후 대구광역시에 있는 측량학교에 입학하여 교육받았다. 이후 신창소학교(新昌小學校)와 대구광역시의 협성중학교(協成中學校)에서 5년간 교편을 잡았다.

그러던 중 1909년 영남 출신의 항일 동지인 안희제(安熙濟), 이원식(李元植), 김동삼(金東三) 등 80여 명과 함께 대동청년당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 12월 서울에 올라와 대종교 교조 나철(羅喆)을 방문하여, 본명이었던 윤세린(尹世麟)윤세복(尹世復)으로 고치고 단애(檀崖)라는 아호를 받아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일제 침략으로부터 조국 해방과 근대적인 민족 자주독립 국가의 건설은 대종교의 민족정신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1911년 1월 29일 시교사(施敎師)에 입명되어 친형 윤세용과 상의하여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1911년 2월 중국 만주 봉천성(奉天省) 환인현(桓仁縣)으로 가 교당을 설립하고 시교하였다. 환인현에서 동창학교, 무송현에 백산학교, 북만주 밀산당벽진에 대흥학교, 영안현 동경성에 대종학원 등을 설립 또는 경영하면서, 5년 동안 간도로 이주해 온 한인 동포들의 자제 교육과 포교 활동에 매진하는 등 민족 교육 사업에 주력하였다.

1916년 무송현 등에 교당을 설립하여 7,000여 명의 교인을 모으는 한편, 흥업단(興業團)·광정단(光正團)·독립단 등의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1919년 2월 「대한독립선언서」에 국외 독립운동가 39명 가운데, 동향인인 황상규·손일민 등과 함께 민족 대표로 서명에 참여하여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였다. 이후 7,000여 명의 대종교도를 이끈 공적이 인정되어 1922년 6월 5일 서일도 본사의 책임자인 전리로 승진되었다.

1923년 10월 대종교 2세 교주 김교헌이 사망하자, 1924년 대종교 제3대 교주의 책임을 맡았다. 1928년 일본 군부에 의하여 대종교 금지령이 내려지자 총본사를 밀산당벽진으로 옮겼다. 대종교 금지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박찬익의 외교 활동으로 1930년 해금되었으나, 1931년 일본의 만주 침략으로 동·서·북도본사가 해체되었다.

1934년 하얼빈시 안평가에서 대종교 선교회를 설치하여, 많은 동포들이 대종교 교당을 찾아 단군 성조의 위덕을 추모하면서 민족 정신을 가다듬게 하였다. 이후 1942년 일제의 ‘임오교변’으로 윤세복은 무기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다가 해방 후 출옥하였다.

1946년 서울로 와 대종교 총본사를 설치하고 단군전 봉안, 교적 간행, 홍익대학의 설립 등을 추진하였다. 특히 전통적인 교통전수제(敎統傳授制)를 선거에 의한 총전교 선임제(總典敎 選任制)로 바꿈으로써 교단 체제를 민주화했고 초대 총전교에 취임하였다.

윤세복은 1960년 2월 13일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윤세복은 1939년 10월 25일 교적 간행위원회를 설립하고 안희제와 강철구 등의 노력으로 교인들의 성금을 모아 1941년 6월에 대종교 규범인 『홍범규재』 500부, 『삼일신고』 2,000부, 단군 사적을 기록한 『신단실기』 1,000부 등을 간행하였다. 또한 대종교 의식을 기록한 『종례총략』 2,000부, 서일이 저술한 『오대종지 강연』 3,000부와 자신이 지은 대종교 해설서인 『종문지남』을 간행하였다.

윤세복은 목단강 액하형무소[제1사 독3방]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감옥에서의 감상을 시조체로 지은 『복당서정』과 『삼일신고』를 한글로 번역하여 주해를 달았으며, 지감법·조식법·금촉법을 통한 수행 지침서인 『삼법회통』을 저술하기도 했다. 1957년 『종사취재고』의 편집 주간을 직접 맡으면서 수십 명의 교인들과 함께 3년간의 작업 끝에 전 15권을 찬술하였다.

[묘소]

윤세복은 2000년 11월 3일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윤세복에게는 1962년 3월 1일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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