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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700528
한자 孫處訥
영어공식명칭 Son Cheonul
이칭/별칭 기도(幾道),모당(慕堂)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경상남도 밀양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영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53년연표보기 - 손처눌 출생
몰년 시기/일시 1634년연표보기 - 손처눌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94년 - 손처눌 청호서원 배향
추모 시기/일시 1970년 - 손처눌 혜산서원에 복향
출생지 손처눌 출생지 - 대구광역시 수성구
사당|배향지 청호서원 - 대구광역시 수성구 청호로 250-11[황금동 79-4]
사당|배향지 밀양 혜산서원 - 경남 밀양시 산외면 다원1리길 17-18[다죽리 607]지도보기
성격 학자
성별 남성
본관 안동

[정의]

경상남도 밀양시 산외면 다죽리 혜산서원에 배향된 조선 전기 학자.

[가계]

손처눌(孫處訥)[1553~1634]의 본관은 안동(安東)[일직(一直)]이며, 자는 기도(幾道), 호는 모당(慕堂)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주부(主簿)를 지낸 손순무(孫荀茂), 증조할아버지는 참봉(參奉)을 지낸 손세경(孫世經), 할아버지는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낸 손치운(孫致雲), 아버지는 선무랑(宣務郞)을 지낸 손수(孫遂)이고, 어머니는 충의위(忠義衛) 이탄(李坦)의 딸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첫 번째 부인은 이원경(李遠慶)의 딸 광주이씨(廣州李氏)이며, 두 번째 부인은 조응의(曺應義)의 딸 하성조씨(夏城曺氏)이다. 손첨(孫添), 손잠(孫潛), 손침(孫沉)의 아들 셋을 두었다. 지금의 대구광역시 수성구에서 태어났으며,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활동 사항]

손처눌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 태암(苔巖) 이주(李輈) 등 지역 인사들과의 대구 팔공창의회맹(八公倡義會盟)에서 의병장으로 추대되었다. 정사철과 서사원이 부모상을 당하자, 손처눌이 의병장과 소모사를 겸직하였다. 손처눌은 의병을 이끌고 달성군, 동화사, 팔조령 등지에서 매복 작전을 전개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손처눌 역시 부모상으로 의병 활동을 중단하고 아우 오매정(五梅亭) 손처약(孫處約)에게 군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1597년 9월 왜적이 다시 대구를 공격하자 팔조령에 의병 부대를 매복하게 하여 왜적을 물리쳤다.

임진왜란 이후 대구 황청동[지금의 대구 수성구 황금동]의 부모 묘소 아래에 영모당(永慕堂)을 짓고 본격적인 강학을 시작하였다. 영모당(永慕堂)에서 길러낸 제자 가운데 ‘영모당통강제자록(永慕堂通講諸子錄)’에 기록된 사람만 202명에 달하였다. 1611년(광해군 3) 이언적과 이황의 문묘종사론(文廟從祀論)을 정인홍(鄭仁弘)이 논척하자, 이에 대항하여 5촌 숙부인 손린(孫遴)과 함께 「부정척사문(扶正斥邪文)」을 지어 비판하였다.

[학문과 저술]

손처눌의 저서로는 『한강예설중찬(寒岡禮說重纂)』, 『가례의절전서(家禮儀節傳書)』 및 『모당집(慕堂集)』 3권 2책이 있다. 『모당집』은 1784년(정조 8) 후손 손양겸(孫養謙)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광정(李光靖)의 서문이 있다.

[상훈과 추모]

손처눌은 1694년 청호서원(靑湖書院) 창건 시 배향되었다. 1970년 밀양의 혜산서원(惠山書院)에 복향 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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