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가야, 신라의 각축장 진안고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800002
한자 百濟-加耶-新羅-角逐場鎭安高原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진안군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조명일

[개설]

고대 진안 지역의 역사에 대해서는 백제의 변방이라는 단순한 인식 속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1990년대 중반 용담댐 수몰 예정 지구에 대한 대대적인 발굴 조사를 통해 다양한 유적과 유물이 확인됨에 따라 진안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대두되었다.

특히 진안군 용담면 월계리에 있는 와정 토성과 인근의 월계리 황산 고분 떼, 삼락리 승금 유적 등에서 백제와 가야·신라 유물이 혼재된 채로 출토되어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또한 2000년대 이후 실시된 각종 지표 조사를 통해, 진안 일대의 산성 및 봉수의 분포상이 파악되었으며, 역사·지리적인 관점에서의 고대 교통로에 대한 복원이 시도되면서, 삼국 시대 줄곧 백제의 영역으로 인식되었던 진안 지역이 백제·신라·가야의 치열한 각축장이었음이 드러나게 되었다.

[진안군의 자연·지리적 환경과 교통로]

진안군은 금강섬진강의 발원지로서, 마이산을 중심으로 북쪽의 금강 수계권과 남쪽의 섬진강 수계권으로 나누어진다.

금강 수계권에는 금강의 본류와 지류를 따라 협장한 충적지가 발달해 있는데, 마이산 북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진안읍을 관통하는 진안천 유역, 동향면을 관통하면서 서쪽으로 흐르는 대량천 유역, 운장산의 남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정자천 유역이 여기에 해당된다. 정자천금강의 본류에 합류하는 정천면 모정리 일대, 장안산의 북쪽기슭에서 발원하여 동류하는 주자천안자천 유역에 협장한 충적지가 발달해 있다. 그중 충적지가 가장 발달한 곳은 정천면 모정리 일대와 용담면 월계리 일대이나 용담댐 건설로 인해 수몰되었다.

섬진강 수계권은 지류를 따라 충적지와 구릉 지대가 조화를 이루면서 발달해 있다. 진안군 마이산과 장수군 팔공산에서 발원한 섬진강마령면 강정리에서 남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성수면과 임실군 관촌면, 신평면을 거쳐 운암면에서 옥정호[섬진강댐]에 유입된다. 섬진강 상류는 산간 지대를 흐르기 때문에 평야의 발달이 매우 미약한 편이나, 마이산팔공산에서 각각 발원하는 지류들이 합류하는 진안군 마령면 일대에는 소규모의 평야가 발달되어 있다.

진안군은 지정학적 이점으로 인해 교통로가 발달하였는데, 교통로는 수계를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크게 남북 방향과 동서 방향 두 갈래로 나뉜다.

남북 방향의 교통로는 금강섬진강 수계 지역을 직접 연결해 주는데, 대전광역시를 중심으로 중부 지역에서 경상남도 하동군을 비롯한 남해안까지 최단 거리를 이룬다. 동서 방향의 교통로는 금남 정맥과 백두대간을 동서로 횡단하는 경로이다. 이 교통로는 육십령으로 연결되는 경로와 월성치·덕산재로 나아가는 경로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적천치 또는 보룡 고개를 통해 금남 정맥을 넘어 진안읍에 다다르고, 다시 동쪽으로 방곡재를 넘어 백두대간의 육십령까지 연결되는 경로를 말한다. 후자는 싸리재를 통해 금남 정맥을 넘어 용담면 월계리에 이르고, 여기서 금강의 본류를 건너 백두대간의 큰 고개인 월성치·덕산재로 연결된다. 그중 진안읍용담면 월계리 일대는 동서와 남북 방향 교통로가 교차하는 교통상의 중요한 요충지이다.

[진안 지역의 고고·역사적 배경]

진안군의 선사 문화에 대해서는 청동기 시대 고인돌 일부가 보고된 것을 제외하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가 1990년대 중반 용담댐 수몰 지구에 대한 대규모 발굴 조사를 통해, 구석기~삼국 시대의 다양한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었다.

구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인 정천면 모정리진그늘 유적이다. 전라북도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구석기 유적으로 후기 구석기 시대 석기 제작소 20여 개소와 화덕 자리가 조사되었으며, 몸돌을 비롯한 돌날, 좀돌날, 슴베찌르개 등이 출토되었다.

신석기 시대 유적은 정천면 갈용리 갈머리 유적을 비롯하여, 상전면 용평리 운암 유적, 정천면 갈용리 농산 유적·진그늘 유적·망덕 유적금강의 연안에서 주로 확인되었다. 여기에서는 주로 화덕과 집석 유구 등 신석기 시대 생활 유적이 조사되었으며, 농경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석부, 굴지구 등의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청동기 시대 유적으로는 다수의 고인돌 유적과 생활 유적이 확인되었다. 이 중 고인돌 유적은 안자천, 정자천, 주자천 등 주로 금강 상류의 강변에서 조사되었다. 안좌동 유적과 여의곡 유적으로 대표되는 안천면 삼락리정천면 모정리 일원에서는 대규모의 군집 묘역이 확인되었으며, 이른바 ‘용담식 고인돌’이라 부르는 특이한 구조의 고인돌이 조사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청동기 시대 이전의 유적에 비해, 원삼국 시대의 유적은 정천면 망화리 이포 마을에서 타날문 토기편이 수습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확인되지 않아 현재로서 그 성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진안군과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고 비슷한 문화 양상을 보이는 전라북도 장수군, 충청남도 금산군 일원에서 다수의 원삼국 시대 생활 유적이 조사되고 있다. 이곳에서 조사된 생활 유적들은 평면 형태나 구조, 출토 유물 등에서 전라북도 서해안 지역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는 마한의 전형적인 주거 양식과 금강 중류, 남해안 일대의 주거 양식이 혼재된 특징을 보이고 있어 문화상으로 점이 지대를 이룬다.

문헌 기록에 따르면, 삼국 시대 진안군은 백제의 난진아현(難珍阿縣)으로 완산주 99현 가운데 하나였고, 월랑(越浪) 또는 월랑(月浪)이라고도 했다. 또한 원용담은 물거현(勿居縣), 마령(馬靈)은 마돌현(馬突縣), 마진(馬珍), 마독량(馬篤良)이라 불리었다. 660년(의자왕 20) 백제가 멸망하고 663년에는 주류성이 함락됨으로써, 진안군은 신라에 편입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 757년(경덕왕 16) 때 전국의 모든 지명을 중국식으로 고치는 과정에서, 난진아현은 진안으로 개칭되어 장계군[현 장수군]의 속현이 되었다. 한편 원용담 역시 757년에 청거(淸渠)로 개칭함과 동시에 진례현(進禮縣)[현 충청남도 금산군]의 속현이 되었으며, 마령은 마령현으로 개칭하여 임실군의 속현이 되었다. 이후 776년(신라 혜공왕 12)에 지명이 다시 바뀌어 물거현, 난진아현, 마돌현으로 환원되었다.

이러한 기록만을 놓고 보면, 진안군은 삼국 시대 줄곧 백제의 영역에 속했던 것으로 인식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간의 고고학적 발굴 조사 성과에 의하면, 4세기대 이후 진안 지역에서는 백제는 물론, 주변의 신라, 가야 세력의 영역 분쟁이 치열하게 전개된 것으로 밝혀졌다.

[와정 토성을 통해 본 백제의 진안고원 점유]

1. 발굴 조사 개요

와정 토성진안군 용담면 월계리 와정 마을의 서남쪽 야산에 자리하고 있는 유적으로, 용담댐 수몰 지구에 대한 발굴 조사를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와정 토성에 대한 발굴 조사는 1996년과 1998년 두 차례 실시되었다.

1996년 군산 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실시된 1차 발굴 조사는 토성이 자리하고 있는 구릉의 서남쪽 정상부를 중심으로 실시되었는데, 조사 결과 삼국 시대 주거지 7동과 대형 저장공 등이 확인되었다. 조사된 주거지들 중 5기의 주거지에서 석재를 사용하여 축조된 구들 시설이 확인되었다.

와정 토성에 대한 2차 발굴 조사는 1998년 전북 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실시되었는데, 구릉 정상부의 가장자리를 따라 목책열과 화재층 등이 확인됨에 따라 이 유적이 단순한 주거 유적이 아닌 토성과 관련된 주거 유적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2. 와정 토성의 입지와 환경

와정 토성이 자리하고 있는 용담면 월계리 일원은 현재 용담댐의 건설로 인해 대부분이 수몰되어 옛 모습을 확인하기 어렵다. 본디 장수 뜬봉샘에 발원한 금강의 본류와 금강의 소지류인 주자천이 합류하는 지점으로 주변에는 비교적 넓은 충적지가 펼쳐져 있다. 이곳은 삼국 시대 내륙 교통로의 분기점인 동시에 여러 갈래의 교통로가 교차하는 곳이기도 하다. 즉 백제 한성기 중앙에서 섬진강 유역 또는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남북 교통로가 이곳을 경유하며, 백제 웅진시기 및 사비시기 수도인 공주와 부여에서 가야 지역 또는 신라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최단 거리의 교통로가 이곳을 통과한다.

와정 토성금강의 본류와 주자천이 만나는 합류 지점의 북쪽에 인접한 높이 300m 내외의 구릉지에 자리하고 있다.

토성의 평면 형태는 발굴 조사에서 확인된 목책열을 기준으로 볼 때, 사다리꼴에 가까우며 규모는 동벽 115.5m, 서벽 100m, 남벽 40m, 북벽 56.5m가량으로 총 둘레는 312m 내외이다. 와정 토성이 자리하고 있는 구릉지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북고남저형의 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외곽은 북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동쪽과 남쪽은 금강 변의 충적지와 접해 있다.

와정 토성에서 서쪽으로 300m가량 떨어진 곳에는 1996년 군산 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조사된 월계리 황산 고분 떼가 자리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금강의 본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한 성재산[318.2m]의 정상부에는 월계리 산성[성남리 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3. 주요 조사 내용

1) 목책 토성

목책 시설은 훼손이 심하게 이루어진 와정 토성의 동남쪽 구역을 제외한 전 구간에서 확인되었는데, 토축 성벽을 쌓기 위한 기초 시설로 파악되었다.

목책을 구성하는 기둥은 직경 30㎝ 내외의 나무를 사용하여 100~150㎝ 깊이로 박았는데, 수직으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위쪽으로 비스듬히 좁아드는 경향을 보인다. 기둥 사이의 간격은 모두가 일정하지 않으나 대체로 85㎝ 내외의 간격을 띈다.

이 같은 형태의 나무 기둥을 성벽의 안과 바깥쪽에 세우고, 중간 중간에 가로목을 댄 다음, 내부를 마사토나 산흙으로 채워 토축 성벽을 축조하였다. 토축 성벽은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갈수록 좁아드는 형태로 성벽의 폭은 위쪽이 400㎝, 아래쪽이 550㎝가량 된다.

목책 토성을 구성하는 기둥 중에는 불에 탄 것이 많으며 기둥열과 성벽 주변에 폭넓은 화재층 및 목탄층이 확인되는데, 이는 와정 토성이 화재로 인해 폐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와정 토성의 서쪽 성벽 구간에서는 길이 500~700㎝ 내외의 석축 시설이 확인되었다. 성벽을 따라 이어지다가 성 바깥쪽으로 꺾여 돌출되는 것으로 보아 성문이나 치의 기초 시설로 추정되었다.

2) 주거지

와정 토성의 내부에서는 모두 7기의 백제 시대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주거지의 평면 형태는 장방형계로 추정되며, 규모는 내부 면적이 30~700㎡로 다양하다. 이 주거지들은 서로간의 중복 양상으로 보아, 시기적인 선후 관계를 두고 조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다만 선행 주거지와 후행 주거지들 사이에 형태나 구조상의 차이가 크지 않은 것으로 보아, 조성 시기의 폭이 크지는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주거지 내부에서는 석재를 사용하여 축조한 구들 시설이 확인되었다. 구들은 대부분이 주거지의 벽면을 따라서 시설되었으며, 구들 형태는 ‘ㅡ’자형과 ‘ㄱ’자형이 있는데, 모두 석재를 사용하여 측벽을 세우고 덮개돌을 덮은 다음 위에 점토를 발라 시설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다만 주거지 중 가장 대형인 4호 주거지는 다른 주거지에서 확인되지 않는 다곬형의 구들 시설이 확인되어 주목되는데, 구들 구조뿐만 아니라 규모, 내부 구조와 출입 시설도 다른 주거지와 차별성을 보이고 있다. 4호 주거지는 내부 면적이 70㎡ 이상으로 다른 주거지에 비해 2배 이상 크며, 내부 공간은 벽체 시설에 의해 주거 공간과 부엌 공간이 구분되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주거지의 출입 시설도 주거 공간과 부엌 공간에 분할 배치된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주거지 내에 장축 110㎝ 내외의 대형 저장공이 있는 것도 매우 특징적이다.

3) 출토 유물

와정 토성에 대한 1·2차 발굴 조사를 통해 대략 350여 점의 토기류가 출토되었으나, 대부분 파손품으로 기형 파악이 가능한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출토된 토기의 대다수는 적갈색 연질 토기로 태토에 비교적 가는 사립이 혼입되어 있으며, 표면에 승석문과 사격자문이 타날되어 있는 것이 주로 확인되었다.

출토된 토기의 주요 기종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삼족 토기는 와정 토성 내 주거지 등에서 5점 정도가 출토되었다. 대부분이 파손되어 접시부와 다리편만 남아 있어 전체적인 형태 파악이 쉽지 않다. 다만 3호 주거지에 출토된 삼족 토기는 접시부의 깊이가 매우 깊고, 손으로 제작된 다리가 접시의 바닥면 중앙 쪽에 가깝게 부착되어 있으며, 뚜껑받이 턱은 돌대형을 이룬다. 이러한 형태의 유물은 백제 한성 시기 때 주로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두 번째로 회청색 경질 토기 중 출토 비율이 높은 뚜껑과 접시류는 비교적 다양한 형식이 확인되었는데, 뚜껑의 경우 꼭지가 붙어 있는 것과 없는 것 두 종류가 모두 출토되었다. 꼭지의 형태는 단추형과 중산모자형의 두 가지가 있는데, 단추형의 손잡이가 부착된 것이 일반적이다. 접시류 역시 깊이가 깊은 것과 낮은 것, 저부의 형태가 원형인 것과 평편한 것 등 다양한 형식이 출토되었다.

세 번째로 목긴 항아리의 경우에는 와정 토성 내부의 구들 시설에서 일부가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파손품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기형 파악은 어렵다. 다만 목부분에 2줄의 돌대를 돌려 3구획 하였으며, 각 구획에는 조밀한 물결무늬가 새겨져 있는 특징을 보인다. 이러한 특징은 가야 토기의 주된 속성으로써, 와정 토성에서 출토된 목긴 항아리는 인접한 가야 지역에서 이입된 것으로 판단된다. 와정 토성의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월계리 황산 고분 떼에서도 이와 비슷한 가야 토기들이 상당수 출토된 바 있다.

마지막으로 시루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시루는 모두 6점이 확인되었다. 일반적으로 시루는 바닥면에 뚫린 구멍의 형태와 뚫는 방식에 따라 시기를 구분하고 있는데, 와정 토성에서 출토된 시루는 원형으로 뚫는 방식과 삼각형 또는 반원형으로 도려내는 방식이 모두 확인되고 있다. 특히 도려내는 방식의 경우에는 한강이나 임진강 유역에서 3세기 중반경에 출현하는 형태 것과 유사한데, 와정 토성 내 주거지 중 가장 늦게 조성된 3호 주거지에서 출토되고 있어 와정 토성의 조성 시기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좋은 자료로 평가된다.

이러한 토기류 외에 구들 시설이 집중적으로 확인된 와정 토성의 서남쪽 구역에서 쇠도끼 2점과 철제 갑옷편 10여 점이 출토되었다. 쇠도끼는 날부분이 삼각형이고, 단면이 사다리꼴에 가까운 형태인 것과 평면 형태가 장방형이고 단면이 말각 장방형인 것이 확인되었다. 갑옷편은 비늘 갑옷을 구성했던 것들로 반타원형의 형태이며, 규격은 길이와 폭이 모두 5㎝ 내외로 비슷하다.

4. 와정 토성의 축성 시기와 성격

와정 토성은 백제 시대의 목책 토성으로 토성 내부에 주거지가 자리하고 있는 유적이다. 토성의 목책열은 구릉의 외곽을 따라 돌려져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남쪽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전모를 밝힐 수는 없는 실정이다. 성벽의 축조 방식은 내측과 외측에 나무를 세우고 중간 중간에 가로대를 댄 다음, 내부에 마사토와 산흙을 반복 다짐하여 토축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 과정에서 목책을 토축 성벽의 상면보다 높게 시설하여 목책 자체가 방어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주변으로 화재층과 목탄층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와정 토성이 화재로 인해 폐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내부에서는 모두 7기의 주거지가 조사되었다. 주거지의 평면 형태는 대체로 장방형계이며, 주거지의 한쪽 벽면에 구들 시설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구들 시설은 ‘ㅡ’자형과 ‘ㄱ’자형이 공존하고 있으며, 축조 재료는 석재와 점토로 구성된 것으로 파악되었다. 구들 시설은 한강 유역의 고구려 보루 유적과 경기도·강원도의 백제 주거 유적에서 주로 발견되며, 호남 지역에서 발견된 예는 광주시 쌍촌동 유적, 장흥군 지천리 유적, 순천시 검단산성 등에서 확인되었다. 또한 최근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임실군 성미산성에서는 와정 토성의 구들 시설과 비슷한 구조가 조사된 바 있다. 아직까지 호남 지역에서 조사된 구들 시설은 수량이 많지 않고 산발적으로 확인되고 있어 이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진한 실정이다. 다만 와정 토성 구들 시설의 경우, 내부에 솥받침으로 사용된 토기나 석재가 확인되고 있어 난방과 취사 기능을 동시에 했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러한 예가 최근 조사된 서천군 지산리 유적에서 보고된 바 있다. 지산리 유적의 경우 축조 재료가 점토라는 점을 제외하면 주거지의 평면 형태, 구들 시설의 구조 등이 와정 토성과 비슷한 점이 많다.

와정 토성은 유물의 조합상과 인접한 월계리 황산 고분 떼의 편년안을 참고하여 5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와정 토성에서 출토된 유물은 삼족 토기, 뚜껑 접시, 시루 등 대부분이 백제 토기이며, 밀집파상문이 새겨진 목긴 항아리와 유충문이 새겨진 뚜껑 등 가야 토기가 일부 섞여 있는 조합상을 보인다. 그런데 주거지의 중복 관계 상 선행하는 주거지에서는 가야 토기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적어도 와정 토성의 축조 주체가 백제이며, 진안고원으로 가야의 진출이 확인된 시점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와정 토성의 초축 시기에 대해서는 선행하는 주거지에서 출토된 유물이 대부분 파손품이기 때문에 정확하게 밝힐 수는 없으나,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가장 후행하는 3호 주거지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의 삼족 토기와 시루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4세기 말엽까지 소급될 가능성이 있다.

와정 토성은 백제 한성시기에 섬진강 또는 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통로상의 거점 확보를 위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다가 475년 백제가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후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던 가야 세력이 팽창하는 과정에서 폐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5세기 중반 이후 가야·신라의 진안고원 진출 과정]

1. 월계리 황산 고분 떼의 조성과 가야 세력의 진출

진안고원에서 신라·가야의 흔적이 최초로 확인된 유적은 바로 월계리 황산 고분 떼이다. 월계리 황산 고분 떼는 1996년 용담댐 수몰 지구에 대한 발굴 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는데, 진안군 용담면 월계리 황산 마을의 동쪽 구릉 지대에 위치한다. 발굴 조사에서는 모두 17기의 구덩식 돌덧널무덤이 조사되었으며, 다량의 백제 토기와 가야 토기, 그리고 일부 신라 토기가 출토되었다.

여기에서 출토된 삼족 토기, 뚜껑 접시류 등의 백제 토기는 인근의 와정 토성에 출토된 유물의 속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가야 토기는 밀집 파상문이 새겨져 있는 목긴 항아리와 뚜껑 접시, 굽다리 접시 등이 주종을 이루는데, 목긴 항아리와 통형기대 등 일부 대가야 양식의 토기를 제외하면, 대부분 진안군과 지리적으로 인접한 장수군 일대의 가야계 고총에서 출토된 유물과 상통한다. 그 밖에 월계리 황산 고분 떼의 5호분·6호분·14호분에서는 신라 양식의 토기인 대부 광구 장경호와 손잡이 달린 잔 등이 출토되었는데,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진안군에서 확인되는 가장 이른 시기의 신라 유물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월계리 황산 고분 떼의 유물 조합 상, 특징적인 것은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2개의 구역 중 조성 시기가 앞선 ‘가’ 지구에는 한 석곽 내에 비슷한 비율로 백제 토기와 가야 토기가 부장되고 일부 신라 토기가 혼재되어 있는데 반해, 후행하는 ‘나’ 지구에서는 가야 토기가 주종을 이룬다는 점이다. 월계리 황산 고분 떼가 처음 조성될 당시, 진안 지역에는 백제와 가야, 신라의 세력이 공존하였다가, 차츰 가야 세력에 의해 편입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황산리 고분 떼 조성 시기는 출토 유물을 근거로 5세기 중후반 경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와정 토성의 폐성 시점과 맞물려 있다. 다시 말하면 와정 토성이 폐성될 즈음에 월계리 황산 고분 떼가 조성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동안 백제에 의해 점유되었던 진안고원 일대가 5세기 중후반 백제의 정치적 혼란기를 겪으면서, 가야·신라의 진출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결과적으로 가야 세력이 진안고원의 새로운 맹주로 급부상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진안고원 산성 및 봉수의 분포 양상 및 특징

현재까지 진안고원에 진출한 가야 세력이 어느 지역의 세력인지 또는 어떠한 경로를 통해 진출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내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다만 2000년 이후 꾸준한 조사를 통해 알려진 진안고원의 산성 및 봉수의 분포 양상을 통해 어느 정도 추정은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진안고원금남 정맥금남 호남 정맥의 준령이 서쪽과 남쪽의 자연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여기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들이 모여 고원 지대가 형성되었다. 이곳은 고대 섬진강·낙동강 유역에서 백제의 중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최단 거리의 교통로가 통과하는 요충지로 금강의 본류와 지류를 따라 여러 갈래의 간선 교통로가 형성되어 있으며, 이 교통로들을 따라 10여 개소의 고대 산성과 20여 개소의 봉수가 선상으로 분포되어 있다.

진안고원을 통과하는 교통로를 중심으로 산성 및 봉수의 분포 양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진안고원에서 백제의 수도인 공주, 부여로 나아갈 수 있는 최단 거리의 교통로로, 진안읍에서 금남 정맥의 동쪽 가장자리를 따라 북진하다가 진안군 용담면의 탁고개를 기점으로 다시 세분된다. 서쪽으로는 금남 정맥의 고갯길인 작은 싸리재를 넘어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고당리를 거쳐 부여 또는 공주를 나아갈 수 있으며, 북쪽으로는 오두재와 성치를 넘어 금산 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다. 교통로를 따라 성뫼산성, 환미산성국사봉 봉수 터·조포 봉수 터가 분포되어 있으며, 교통로가 갈라지는 탁고개를 중심으로 운봉리 산성과 봉수가 양쪽에 배치되어 있다.

탁고개는 위에서 설명한 남북 교통로의 분기점이면서 동시에 무주 남대천을 따라 서쪽으로 이어진 동서 교통로의 합류 지점으로 교통의 요충지에 해당된다. 탁고개의 동쪽 봉우리[590m]에 있는 운봉리 산성은 둘레가 120m가량 되는 석축성으로 알려져 있으나, 지금은 대부분 붕괴되어 무너진 석재만이 확인된다. 맞은편 봉우리[533.2m]에 있는 운봉리 봉수는 직경 20m 내외의 평탄 대지가 형성되어 있으며, 중앙부에 직경 2m 내외의 토단이 마련되어 있다.

운봉리 봉수에서 서북쪽으로 4㎞가량 떨어진 곳에는 태평 봉수대성재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태평 봉수대금남 정맥의 큰 고갯길인 작은 싸리재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축조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현재 장방형의 연대가 복원되어 있으며, 주변으로 삼국 시대 토기편이 산재되어 있다.

진안군과 금산군의 경계를 이루는 산줄기 상에는 선봉·성치산 봉수용덕리 산성[옥거리 산성]이 자리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한 갈래의 봉수로가 전라북도 금산군 추부면의 매봉재 봉수까지 이어진다. 봉수로는 진안고원과 금산 지역을 잇는 최단 거리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진안 선봉 봉수를 기점으로 금산 백암산~진악산~월봉산~국사봉~만인산~매봉재 봉수까지 남북 선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특히 금산에서 서쪽으로 논산을 거쳐 부여, 공주로 진출할 수 있는 고갯길의 주변에는 산성 및 봉수가 인접해 있는데, 금산군 금성면과 진산면을 잇는 월봉재를 사이에 두고 월봉산 봉수와 마전리 산성이 분포되어 있으며, 금산군과 완주군을 잇는 길목에는 백령산성과 백암산 봉수가 자리하고 있다.

두 번째로 장수군 천천면에서 진안군 안천면, 용담면을 지나 솔재를 넘어 금산 지역으로 나아가는 남북 교통로로, 금강의 본류를 따라 큰 장애물 없이 이어진다. 교통로의 동쪽과 서쪽에는 성주봉~구룡리 매봉~지장산~봉화산 봉수가 대략 4㎞의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있다. 특히 무주에서 진안을 거쳐 부여, 공주로 진출할 수 있는 동서 교통로와 진안과 금산을 이어주는 남북 교통로가 교차하는 진안군 용담면 월계리 일원에는 와정 토성과 월계리 산성이 자리하고 있어 전략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와정 토성에서 남쪽으로 금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성재산의 정상부[318.2m]에는 월계리 산성[성남리 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이 산성은 둘레 400m가량의 테뫼식 석성으로 성벽은 협축과 편축이 혼용되었으며, 성 내에서는 삼국 시대 토기편과 기와편이 수습된 바 있다. 이 산성을 『일본서기』 현종 3년조에 보이는 임나(任那)의 대산성(帶山城)으로 비정하는 학설이 있는데, 그 근거로 월계리 산성의 입지가 금강을 따라 띠처럼 형성된 산줄기에 자리하고 있으며, 이곳이 당시 백제의 수도인 공주에서 동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통로[東道]상인 점을 들고 있다.

아직까지 진안고원에 분포되어 있는 산성 및 봉수에 대한 발굴 조사 이루어지지 않아 그 성격을 명확히 밝힐 수는 없지만, 산성의 경우, 산 정상부를 한 바퀴 감싼 테뫼식이며, 다듬어지지 않은 돌을 사용하여 외벽만을 쌓은 편축식 성벽이 확인되고 있다. 또한 대부분 둘레가 400m가 넘지 않는 소규모의 산성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특징은 지리적으로 인접한 섬진강 유역[임실, 진안 서남부권]에서 확인되고 있는 백제 산성들의 구조적 특징보다는 오히려 옛 가야 지역의 산성들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봉수의 경우, 우리나라 봉수제가 성립된 고려 중기 이후의 문헌 기록에서 그 존재를 전혀 찾을 수가 없으며, 조선 시대 5봉수로가 통과하지 않는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 또한 삼국 시대 축성된 고대 산성과 지근거리에 분포되어 있으며, 봉수 터에서 삼국 시대의 유물만이 소량 수습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을 종합해 볼 때 진안고원의 봉수들은 삼국 시대 축조·운영되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판단된다.

봉수의 축성 주체에 대해서는 봉수의 분포 양상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진안고원의 봉수들은 고대 교통로를 따라 여러 갈래의 봉수로가 형성되어 있는데, 특징적인 것은 이 봉수로의 종착지가 모두 장수·장계 분지[전라북도 장수군 일원]라는 점이다. 이는 봉수의 주된 기능이 통신 수단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봉수의 주체가 장수 분지·장계 분지에 있던 고대 세력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밝혀진 고고학적 연구 성과에 따르면, 장수 분지·장계 분지에는 6세기 중반 백제에 완전히 복속되기 이전에 가야 문화를 기반으로 발전하였던 강력한 세력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안고원의 역사성 및 향후 과제]

진안고원은 백제와 가야, 백제와 신라를 잇는 교통의 거점 지역으로서 각국의 치열한 각축전이 벌어졌던 곳이다.

백제는 4세기 말경 교통의 핵심 지역인 용담면 월계리 일원에 와정 토성을 축성하여 섬진강·낙동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는 한편, 진안고원의 주도권을 장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웅진 천도 이후 일련의 정치적 혼란기 속에 진안고원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됨에 따라, 주변의 가야·신라 세력들이 진안고원에 대한 진출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조성된 월계리 황산 고분 떼에서는 백제와 가야, 신라 토기가 혼재되어 있다가, 점차 가야계 일색을 변화하는 양상이 확인되었는데, 이러한 정치적 상황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진안고원에 분포되어 있는 다수의 산성과 봉수들로 이 시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산성의 축조 방식이나 규모 등이 가야계 산성과 흡사하며, 봉수의 분포권이 장수 분지·장계 분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다. 이는 진안고원의 산성과 봉수들이 당시 장수 분지·장계 분지에 존재했던 가야 세력에 의해 축조·운영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6세기 초반 백제가 정치적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진안고원의 주도권은 다시 백제로 넘어갔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는 정천면 모정리 여의곡 유적 등에서 백제의 중앙 묘제인 굴식 돌방무덤이 확인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여의곡 돌방무덤은 산 능선의 남쪽 경사면에 축조되어 있으며, 장축 방향은 등고선과 직교하고 있어 일반적인 백제 석실분의 입지 조건을 잘 갖추고 있다. 석실분의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며, 연도[묘실로 들어가는 입구]는 우측에 편재되어 있다. 천정부는 터널식으로 추정되며, 석실의 축조에는 다듬어지지 않은 할석과 천석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형태의 석실분은 백제 웅진기의 대표적인 형식으로 6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지방으로 파급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처럼 진안고원은 삼국 시대 백제, 신라, 가야의 역학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자료의 한계로 인해 학계의 큰 관심과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1990년대 말에 이루어진 용담댐 수몰 지구에 대한 발굴 조사 이후, 이렇다 할 한 학술 조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관련 연구자들도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진안고원의 화려했던 역사와 문화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만 하는 과제로 생각된다. 그간의 각종 지표 조사와 개별적인 학술 조사를 통해, 진안고원의 문화 유적이 상당 수 알려진 만큼, 이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과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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