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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읍성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2118
한자 濟州邑城
영어음역 Jejueupseong
영어의미역 Jejueupseong Fortress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동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읍성
소재지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이도1동 지도보기
문화재 지정번호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에 있는 제주목사가 근무하던 제주목 관아와 그 주변을 둘러싸던 성.

[개설]

제주읍성은 1105년(숙종 10) 탐라군이 설치되면서 축성되었다. 당시의 읍성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탐라국 시대의 성곽을 활용하여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제주읍성은 행정적인 목적 외에도 군사적인 기능도 지니고 있었다. 유사시에 적의 침입으로부터 읍성을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성곽의 입지적 조건으로 자연적 지형이 매우 중요하게 고려되었다.

[건립경위]

제주읍성은 본래 동쪽의 산지천, 서쪽의 병문천 사이에 성을 쌓아서 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였다. 그러나 성 안에 우물이 없어 백성들이 큰 불편을 느끼자 1565년(중종 20) 곽흘 제주목사가 성을 가락천 밖으로까지 넓혀서 축성하였다. 이때부터 산지천과 가락천이 제주읍성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형태]

1599년(선조 32)에는 성윤문 제주목사가 초루(譙樓: 궁문, 성문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 및 남수각·북수각·제어각 등을 설치하였다. 하지만 겨울철에 공사가 이루어져 작업을 하다 죽은 사람이 10명 중 2~3명에 이르러 제주도민들은 제주읍성을 원축성(怨築城)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1652년(효종 3) 8월에는 폭우로 인하여 남수구와 북수구가 무너지자, 이원진 제주목사가 중수를 하면서 위에 정자를 세워 공진루(拱振樓)라 이름 붙였다

제주읍성을 동쪽으로 더 늘려 쌓은 이후, 폭우 때마다 산지천이 범람하여 민가가 침수되는 피해가 계속 발생하자 1780년(정조 4)에 김영수 제주목사는 옛 성터를 따라 길이 551보, 높이 9척의 간성(間城)을 쌓았다. 그리고 간성 남북에 두 개의 문을 개설하여 남문을 소민문(蘇民門), 북문을 수복문(受福門)이라 하였다.

1847년(헌종 13)에는 이의식 제주목사가 북수구의 성을 좀더 북쪽으로 퇴축하고 성 위에 천일정(天一亭)을 세웠으며, 수복문을 중인문(重仁門)으로 개편하였다.

제주읍성의 관아 시설로는 궐패와 전패를 모셔놓고 초하루와 보름에 향궐 망배를 하던 영주관을 중심으로 영청인 홍화각, 제주목사의 동헌인 연희각, 그리고 판관의 동헌인 찬주헌 등이 있다.

또한 제주목사·제주판관의 사적인 공간인 내아가 있으며, 좌수·별감이 집무하던 향청, 육방의 우두머리가 집무하던 작청, 군장교의 집무처인 장청, 회계 사무를 관장하던 공수청, 죄인을 가두는 감옥, 노복들의 거처인 관노방 등의 관아 시설이 있었다.

[현황]

제주읍성은 구한말까지 유지되다가 1910년 읍성 철폐령이 내려지면서 훼철되기 시작하였다. 1913년에 북성문, 1914년에 동성문·서성문·간성문 등 대부분의 문루가 헐리었고, 1915년에 소민문과 북성, 1918년에 남성문루가 훼철되었다.

1923년에는 동성 위에 측후소가 개설되었으며, 1920년대 후반 대대적인 산지항 축항 공사가 이루어져, 바다 매립을 위한 용도로 돌이 쓰이면서 제주읍성의 대부분 헐리고 말았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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