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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기 한 대로 사형 집행」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1299
한자 - 死刑 執行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유형 작품/설화
지역 경기도 화성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원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채록|수집|조사 시기/일시 1980년 10월 4일 - 「볼기 한 대로 사형 집행」 안익승으로부터 채록
수록|간행 시기/일시 1981년 9월 30일 - 「볼기 한 대로 사형 집행」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에 수록
관련 지명 용주사 -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187-2 지도보기
채록지 경기도 수원시 교동
주요 등장 인물 정조|악승

[정의]

경기도 화성시 용주사의 승려가 악행을 저질렀는데 정조가 볼기 한 대만 어명으로 구형하자, 관리가 지략을 내어 악승을 죽인 이야기.

[개설]

「볼기 한 대로 사형 집행」정조대왕이 부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용주사를 세우고 각별 대우를 하였더니 악승이 범행하였는데, 정조가 볼기 한 대를 어명으로 구형함에 그치자 지역 관리가 볼기 한 대만으로 극단적 처벌을 할 지략을 찾아 결국 죽게 만든 이야기이다.

[채록/수집 상황]

1981년 9월 3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행한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에 「볼기 한 대로 사형 집행」이라는 제목으로 77~79쪽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볼기 한 대로 사형 집행」 이야기는 1980년 10월 4일 경기도 수원시 교동에서 채록되었으며, 구연자는 안익승[남, 62세]이며 조사자는 성기열, 김용범이다. 「볼기 한 대로 사형 집행」은 경기도 수원시에서 수집되었으나 이야기 속 인물과 관계하는 배경 지역인 용주사는 현재 화성시 송산동에 속한다.

[내용]

정조대왕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산소를 모신 화성 지역을 각별하게 대하였다. 특히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용주사에는 팔도 전체를 통괄하는 도승원을 두었다. 용주사에서는 나라 제사에서 쓰는 두부를 만들어 조포사라고도 했다. 그런데 용주사의 중들은 이러한 정조대왕의 호의를 뒷배로 믿고 심한 행패를 부렸다. 하루는 용주사의 한 중이 소복을 입은 젊은 과부 앞에다가 오줌을 갈기고 능욕한 사건으로 고발이 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에 대한 상소를 받은 정조대왕은 “그냥 풀어주라.”고 하였고, 이에 신하들은 “안 됩니다. 꼭 벌을 주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정조대왕은 “정 그렇다면 볼기 한 대만 때리고 내보내라.”고 하였다.

지역의 사또는 정조대왕이 내린 어명을 거역할 수는 없으니 볼기는 한 대만 때려야 하는데, 용주사 중의 악질적 범죄는 엄벌을 받아 마땅하기에 고민하였다. 그러다 볼기 한 대만을 때리고도 죄인을 죽일 수 있는 장정을 찾기로 했다. 그러는 중 한 장정이 자기가 해보겠다고 나섰다. 장정은 중의 볼기를 때릴 듯이 하다가 안 때리고, 또 때릴 듯이 하다가 때리지 않기를 반복하였다. 때릴 듯이 하다 때리지 않는 것이 여러 번 계속 반복이 되자 누워있던 중은 긴장을 풀게 되었다. 그래서 장정이 마지막으로 진짜 때리려고 하던 차에도 중은 ‘이번에도 내가 속으랴.' 하고 엉덩이에 힘을 안 주고 있었다. 그때 장정이 볼기를 세게 쳐 올렸다. 예로부터 똥구멍으로 바람을 넣어 쳐 올려 볼기를 때리면 간까지 공기 압력으로 올라가서 사람이 죽게 된다고 하여 그렇게 한 것이었다. 관아에서는 볼기 한 대를 때린 후 즉시 중을 내놓아 풀어줬는데 그때만 해도 중은 히죽히죽 웃으면서 걸어 나갔다. 그런데 걸어가던 중이 얼마 있지 않아 길에 엎드러졌고 바로 죽었다. 용주사의 중이 볼기를 맞고 죽어 나라에서 조사를 하였으나, 어명대로 볼기 한 대만을 때린 것뿐이라 결국 어쩌지 못했다.

[모티프 분석]

「볼기 한 대로 사형 집행」 이야기는 왕의 특별 대우를 받는 승려의 악행과 처벌이라는 모티프가 주요한 내용이다. 여기서 주요 쟁점은 범죄자인 용주사 승려의 처벌 수위에 대한 정조대왕과 여론의 상반된 태도이다. 정조대왕은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용주사를 각별히 여기기 때문에 용주사 악승의 범행과 처벌을 가벼이 다뤄주고자 한다. 그러나 조정의 신하들과 지역의 관리 및 민심은 악승을 엄벌에 처하길 원한다. 그러나 정조대왕은 결국 볼기 한 대라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벌을 어명으로 내렸다. 이를 지킬 수밖에 없는 해당 지역 관리는 승려의 악질적 범죄에 대한 괘씸함에 정조의 부당한 어명으로 인한 반발심을 더하게 된다. 이에 표면적 형벌은 볼기 한 대이지만 실질적으로는 가장 극단적 엄벌인 사형을 받게 할 수 있는 지략 방법을 찾아 이를 실행한다. 결국 찾아낸 방편으로 볼기 한 대만을 맞고 용주사 승려는 죽게 되는데, 이는 지나친 효심으로 인해 정조대왕의 시시비비 판단이 어긋남을 바로잡고자 하는 민중의 비판적 인식이 반영된 것이다. 또한 관리는 형벌 어명의 표면적인 형태, 즉 볼기 한 대의 수량적 측면은 지키려고 하되, 이면에서는 민심에서 옳다고 여기는 엄벌의 질적 측면, 즉 실질적으로는 어명을 어기고 사형을 계획하고 집행하는 주체적인 태도를 보인다. 이는 어명으로 내려온 공적 재판의 구형 결과에 순응하는 척 하면서, 실질적으로는 성난 민심을 반영하여 극단적 엄벌 수위의 사적 복수를 하는 것이다. 이렇듯 정조대왕에 대해 효성이 지극한 성군(聖君)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윤리 도덕을 어지럽힌 관계자의 악질적 범행을 눈감아 주는 난군(亂君)의 면모를 나타내는 점에서 지역민의 다층적 평가 인식을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 성기열, 『한국구비문학대계』 1-5: 경기도 수원시·화성군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1)
  • 한국민속대백과사전(https://folkency.nfm.go.kr)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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