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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화당, 경기도에 현존하는 유일한 기로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600013
한자 風化堂, 京畿道- 現存- 唯一- 耆老會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시장로45번길 8-3[남양리 651-6]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오창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54년 - 정돈계 결성

[정의]

경기도 화성시에 남아있는 경기도에서 유일한 기로회의 후신.

[개설]

기로회는 지역 내 유교적 예속을 규율하며 모범을 실천해온, 조선 후기 향약 전통을 잇고 있는 지역 은퇴 관료 모임이다.

[기로회의 결성]

남양 풍화당기로회(風化堂耆老會)는 정돈계(正敦稧)에 기원하고 있다. 1875년 「망장중수서(望葬重修序)」에 따르면, 1853년(철종5) 늦은 봄에 이미 기영사(耆英社)라는 이름의 계가 결성되었고, 1854년(철종 5) 3월 남양 도호부사로부터 「정돈계절목(正敦稧節目)」을 받았다. 이에 따르면, 정돈계는 “기강이 무너지고, 난폭한 습속이 날로 만연해져, 부랑배들이 시시때때로 증가하고 [중략] 어린 자가 어른을 능멸하고, 폭음과 잡기 등 여러 고질적인 폐단이 생겼던” 당시 상황에 대응해 “풍기를 바로잡고 시속을 돈후하게 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이후 1864년(고종 1) 정돈계는 ‘기영사(耆英社)’ 혹은 ‘당성기영사(唐城耆英社)’로 이름이 바뀌었다. 1864년에 비로소 ‘풍화당’이라는 이름을 지어 관의 승인을 받았고, 이의상(李宜相)이 풍화당의 제1대 회장으로 임명된다. 따라서 1864년이 사실상 풍화당기로회의 창설년이 된다고 말할 수도 있다.

기로회라는 명칭은 1913년 이후 기록에서 나타나지만, 공식적인 규칙으로는 1922년에 「풍화당기로회규칙(風化堂耆老會規則)」을 통해 풍화당기로회로 개칭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기로회의 조직 구성]

1854년 「정돈계절목(正敦稧節目)」의 추기를 보면, 정돈계는 부 내 4개 동의 예속을 규율하기 위해 결성되었다. 따라서 부 내에 세거해 온 50세 이상인 사람 중에서 음관이나 장관(將官)[군사를 거느리는 우두머리] 등의 고위 관료를 역임한 자와 외지에 거주하더라도 그와 같은 조건에 부합하는 자만을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다 촌에 사는 사람 중에서도 높은 자리를 거치고 깨우침이 있는 사람이나 일찍이 나아가 변장(邊將)[변경의 장수]을 역임하는 등의 입신양명한 자에게도 가입이 허락되었다. 1864년 「풍화당신설입의절목(風化堂新設立義節目)」은 “본부 경내 출신과 실직당상 중에 변장을 지낸 사람은 입록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풍화당 자문위원인 홍승길[1934년 생]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에는 조상 중 풍화당 회원이 있거나 유교 경전을 익히거나 문장을 쓸 수 있으면서도 주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들이 당원이 되기에 쉬웠다. 늦어도 1950년대 이후로는 가입 범위가 남양면뿐 아니라, 마도면, 서신면, 비봉면 등지의 거주자까지 확대되었다.

2019년 현재 풍화당기로회의 회원은 모두 58명이다. “최근까지 가입연령은 만 65세 이상으로 하한선만 규정되어 있었는데, 최근 총회에서 만 70세 이상 82세 이하로 하한선을 높이고 상한선을 설정했다. 평균 수명이 길어지면서 하한선을 높인 것이고 너무 나이가 많아 기로회 활동이 어려운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제한하기 위해 상한선을 둔 것이다. 회원 가입은 수시로 이루어진다. 남양읍, 비봉면 등 과거 남양도호부 권역에 거주하는 “본회의 목적에 찬동하는 자로서 덕망 있고 고위 공직에서 퇴직한 만인이 존경하고 품행이 방정한” 자가 기존 회원 1인 이상의 추천을 받아 신청하면, 이사회에서 심사한 후 이듬해 2월 이전에 개최되는 결산총회에서 최종 입회 여부를 결정한다.

[기로회의 모임장소, 풍화당]

2019년 현재 풍화당기로회는 1867년 건립된 남양부사가 기거했던 조선 시대 관아의 안채와 1930년경 용백사에서 옮겨온 1칸 반을 붙여 본채로 사용하고 있으며, 건물은 2002년 9월 16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용백사는 중국 제갈량과 윤계(尹啓) 제향하는 사당이었는데, 일제 강점기 건물을 매입해 풍화당의 안채에 붙여 놓은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1921년 「풍화당기로회기안(風化堂耆老會記案)」에는 “1930년 2월 무후청(武侯廳) 사옥[와당, 臥龍堂]을 군청이 입찰·매각할 때 매수해 고지기방[창고지기의 방] 1칸 반과 정문 좌우의 행랑 3칸을 지었다.”고 적혀 있다. 본채 외에 본채 오른편에는 화장실 1동과 회의실 1동을 임시건물로 지어 사용하고 있다. 또, 풍화당의 대문에는 과거 남양도호부의 정문인 와룡루에 걸렸던 현판이 걸려 있다. 현재 풍화당에 걸려 있는 현판은 복제품이며, 진품은 2011년 화성시에 기증되어 화성시 향남읍의 화성시역사박물관 전시실에서 관람할 수 있다.

1854년 「정돈계절목(正敦稧節目)」의 추기를 보면, “노인이 모일 장소가 없을 수 없기에 창고를 얻어 고친다[不可無諸老杖屨之所 得廢業廠舍 一新修葺].”고 적혀 있어, 정돈계의 결성 초기부터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1873년 「당성기영사기(唐城耆英社記)」를 보면, “남양의 기영사를 풍화당이라 불렀다[唐城府治有耆英社或稱風化堂].”고 하고, 1875년 「망장중수서(望葬重修序)」에서도 기영사를 설명하며 이를 풍화당이라고 불렀다[又名風化堂 … 謂風化堂稧矣]고 적고 있다. 이를 통해 일찍부터 기영사와 풍화당이 동일시되어 이미 기영사가 일정한 모임장소를 가지고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19세기 말 풍화당의 위치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지만, 1920년 「남양풍화당사적(南陽風化堂事蹟)」에 “본래 사용하던 회의실을 1908년 남양공립보통학교 교수실로 양도했다.”고 적혀 있어 과거 남양공립보통학교의 자리에 기로회의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기영회는 기곡리의 개인 집 행랑 4칸을 구입해 회의실로 사용하다가 관의 도움을 받아 1918년부터 음덕면의 구 사무실을 구입해 사용하게 된다. 일본인 기노시다가 남양부의 내아를 가마니 매입장과 창고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를 1929년 매입해 현 위치로 이전했다. 1929년까지 사용한 사무실의 위치는 1995년 2월 현 남양2리회관 앞에 세운 남양2리회관준공기념비(南陽二里會館竣工記念碑)를 통해 알 수 있다. 비문에 “1917년 남양풍화당기로회에서 남양면 남양리 1239번지 대지 28평을 60원에 구입하여 [중략] 이 회가 1929년 남양면 남양리 651-6번지로 이전하면서 우리 마을에 희사하여 1992년까지 마을회관으로 사용하였다.”고 적혀 있어 풍화당기로회가 현재 주민복지회관의 부지를 1929년까지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풍화당의 뒷마당에는 3층짜리 현대식 건물이 2채 서 있는데, 풍화당기로회가 재원 확보를 위해 과거 회원들이 희사한 농지를 팔고 회원들의 찬조금을 합쳐 새로 지은 것이다. 이와 관련한 공을 세운 회원을 기리는 비석도 뒷마당에 세워 두었다. 풍화당기로회는 2019년 현재 이 건물들을 학원과 유치원에 각각 임대해 활동 재원으로 삼고 있다.

[기로회의 활동]

2019년 정관에 따르면, 풍화당기로회의 목적은 “선현의 말씀을 익혀 덕행을 쌓고 윤리 도덕을 솔선수범하여 예의범절을 몸소 실천하여 이웃의 사표가 되며, 효열과 모범인을 표창하여 이를 널리 알려 귀감이 되게 하며 아해들을 충효와 도덕의 바탕 위에 인성교육에 치중하여 올바르게 살 것을 가르치며, 경로사상과 미풍양속을 계승 발전시켜 주위를 화목케 하며 회원 간의 경하조의엔 상부상조하고 병상위문하며 또한 여가 선용을 풍류와 오락 명승지 관광으로써 즐겨 옛 선비의 뒤따름을 목적으로 한다.”고 해 과거의 전통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풍화당기로회는 위와 같은 목적에 부합하는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우선 대표적인 세시(歲時) 행사로는 근래까지 ‘도배’와 ‘시복’이 있었다. 도배는 정월 설에 당원들이 모두 모여 안채에서 양쪽으로 늘어서 맞절을 하는 신년하례식이다. 시복 행사는 초복·중복·말복 때 함께 모여 음식과 함께 기생을 불러 장구를 치며 개고기와 술을 먹는 것이다. 이는 1922년 「풍화당기로회규칙」 10항의 세말제석(歲末除夕) 고사와 13항의 삼경복일(三庚伏日) 행사의 전통을 이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정초의 도배식은 준비의 어려움으로 중단되었다. 대신 4~5월경에 전회원이 참석하는 버스를 빌려 명산이나 유명 관광지를 다녀오는 봄 야유회를 진행한다. 또, 분기별로 한 번씩 풍화당 내나 외부 음식점에서 회식을 하고 있다. 분기별 회식과는 별개로 복날에는 풍화당에 모여 소머리를 푹 고아서 나누어 먹는 복달임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노제도 풍화당기로회의 중요한 행사였다. 노제는 사망한 회원의 상여가 나가는 날 장지로 가기 전에 풍화당에 들려 회원들이 함께 지내는 제사이다. 노제 당일 당원들은 모두 의복을 갖추어 입고 풍화당 앞에 모여, 회장이 작성한 축문을 읽으며 노제를 올렸다. 망자의 자손들뿐 아니라 주변에 사는 사람들도 이 노제를 큰 영광으로 생각했다. 이 전통은 1922년 「풍화당기로회규칙」 10항 부의와 발인시의 치제 항목의 전통을 이은 것이다. 그러나 과거 중요한 의식이었던 노제도 화장 문화가 점차 늘어나고 상여 사용 비율이 급감하면서 사라지고, 2009년 4월 13일 총회에서 부의금 100만 원을 지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풍화당의 대표적인 세시 행사로는 백일장이 있었다. 과거 백일장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의 한문 실력과 학식을 갖추었는가가 입회 자격 조건이 될 정도로 백일장은 풍화당의 명성을 자랑하는 행사였다. 아침에 당주가 시구(詩句)를 제시하면, 20~30명의 참여 회원들이 해당 시구에 맞춰 글을 써내는 방식이었다. 백일장에 참가하는 당원들은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참석했다. 당원이면 참여 자격이 있지만, 일정 수준의 글쓰기 능력이 되지 않으면 감히 출품할 수 없었다. 당선자에게는 주로 옷감 등 의복류를 상품으로 주었고, 행사 직후에는 큰 잔치를 열었다. 당선작은 수원의 화홍문화제에 출품되었다. 과거 백일장이 가장 큰 행사였지만 한학에 밝은 회원이 점차 줄면서 수십 년 전에 중단되었다.

따라서 현재 풍화당기로회의 가장 큰 사업은 정기총회가 되었다. 정기총회는 예전에 연 2회 열렸지만, 현재는 매년 2월경 1회만 개최하고 있다. 2019년 기준 166회가 진행되었다.

앞서 활동의 주요 목적이 회원 간 친목을 제고하고 스스로 유교적 예속의 모범이 되는 데 있었다면, 효자·효부상 시상과 장학금 지급 행사는 지역의 유교적 예속을 강화하는 활동이었다. 1922년 「풍화당기로회규칙」에는 기재되지 않은 활동이지만, 오랫동안 풍화당기로회가 학교 건립과 유지에 힘을 써 왔다는 사실에 비추어 보면 오래된 전통이라고 볼 수 있다. 1921년부터 작성된 「풍화당기로회기안」을 통해 풍화당기로회가 주민들의 효행을 포상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22년 경기도 수원군 음덕면 남양리[현재 화성시 남양읍] 에 거주하던 서백호에게 효행찬송문과 찬송록을 제작하고 효자비를 세워 주었고, 1923년에는 서울 조선공도회가 내린 표창장, 효자문패, 은패(銀牌)를 서백호에게 전달해 주었다.

현재 풍화당기로회의 정관 33조와 34조에서는 장학금 지급과 효자·효부·열녀 표창을 주요 사업으로 규정하고 있다. 과거 효자·효부상 시상은 보통 봄과 가을 2회 열렸고, 효자·효부 선정은 이장·면장으로부터 추천을 받아 선정하고 있다. 장학금 지급은 남양읍 관내뿐만 아니라 옛 남양부에 속하는 서신·비봉·팔탄면 소재 학교장의 추천을 받아 중·고등학생에게 매년 지급했지만, 현재는 남양읍 학교에 한정해 지급하고 있다. 현재도 효자·효부와 장학생 선정 사업은 지속되고 있지만, 예전처럼 별도의 독립된 행사가 아니라 정기총회의 한 행사로 진행되고 있다.

남양 풍화당 기로회는 19세기 중반 사회적 혼란기에 대응해 지역 사회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퇴임 관료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남양 풍화당기로회는 조선 시대 기로회의 전통을 잇는 전국적으로 몇 안 되는 조직으로, 급격한 사회 변동 속에서도 회원들 간의 상부상조의 정신과, 지역 사회에 유교 공동체 문화의 핵심적 가치를 전파하는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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