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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3100396
한자 獨立運動家
영어의미역 Independence Fighter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기도 광명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양윤모

[정의]

개항기와 일제강점기 민족 독립을 위해 경기도 광명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운동가들.

[개설]

대한제국기와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1945년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광명 지역에서는 독립 운동과 항일 운동이 부단하게 전개되었다. 광명지역에서는 여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활약하였다.

[개항기 의병 활동]

1866년 시흥군 서면 철두리에서 태어난 장원겸(張元謙)은 충청남도 직산군 일대에서 길찬범(吉贊範) 의병부대와 안흥관(安興寬)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07년 음력 8월, 길찬범은 총기를 휴대하고 충청남도 직산군의 순사 주재소를 습격하여 단총 1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얼마 후 체포되어 7년 동안 옥고를 치르고 풀려나왔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1만세 운동 관련 독립운동가]

1919년 3월 27일 밤 소하리에 살던 이정석은 노온사리 경찰 주재소 앞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3월 28일 노온사리 경찰관 주재소 순사보 최우창(崔禹昌)과 순사보 가나사와[金澤成雄]에게 끌려갔다. 이정석의 아버지 이종원(李宗遠)은 큰아들이 주재소에 끌려가자 같은 동네에 사는 최호천(崔浩天)의 집으로 달려갔다. 당시 최호천은 배재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서울에서 만세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면서 휴교령이 내리자 고향 집에 돌아와 있었다.

최호천과 함께 배재고등학교를 다니고 있던 윤의병(尹宜炳)도 휴교령으로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윤의병은 이순만(李順萬)을 통해 이정석이 노온사리 경찰관 주재소에 잡혀 있다는 소식을 듣고 힘을 보태기 위해 마을 사람 20여 명과 함께 소하리 내대촌에 있는 주막거리로 갔다. 그곳에는 벌서 최호천이 동리 사람 100여 명을 이끌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후 최주환(崔周煥)유지호(柳志浩) 등도 소식을 듣고 달려 나오면서 시위대는 200명 가까이 되었다.

시위대는 먼저 주재소를 포위한 후 “이정석을 내 놓아라.”고 함성을 지르면서 몽둥이로 주재소 앞 게시판을 때려 부수었다. 당시 주재소 안에 있던 일본인 순사 아카마쓰[赤公]는 시위대의 기세에 눌려 시흥 본서로 이송된 이정석을 다음날 풀어 주겠다고 약속했으나, 그 약속을 지키지 않고 시위대를 모두 잡아들였다.

이 사건으로 이정석은 대구복심법원에서 벌금 30원(圓)을 언도받고 출옥했으며, 최주환유지호는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윤의병은 2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최호천은 궐석 재판에서 징역 4년을 선고 받았다가 1920년 말에 체포되어 2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90년 최주환·유지호·최호천·윤의병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으며, 이정석에게는 1992년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이외에도 당시 만세 시위운동에 적극 가담한 인물로 최정선과 김인한 등 여러 명이 있으나 아직 독립 유공자로 서훈되지는 못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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