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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5042
한자 -傳說-金德齡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송기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67년 - 김덕령 출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61년 - 김덕령 신원(伸冤)되어 관작 복구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68년 - 김덕령 병조참의로 추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81년 - 김덕령 병조판서로 추증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78년 - 김덕령 광주 벽진서원에 제향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96년 - 김덕령 사망

[정의]

광주광역시 전역에 전승되고 있는 임진왜란 당시 활양한 장군 김덕령과 관련된 전설.

[개설]

김덕령은 광주 출신으로 임진왜란때 활약하였다. 광주에서는 김덕령과 관련된 다양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김덕령 전설의 유형은 출생담, 비범담, 활약담, 사망담 등으로 전승되고 있다.

[김덕령의 삶]

김덕령(金德齡)[1567~1596]은 1567년 광주 충효동에서 가난한 양반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붕섭(金鵬燮)이고, 어머니는 남평반씨(南平潘氏)이다. 김덕령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와 우계(牛溪) 성혼(成渾)에게 수학하였다. 김덕령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형 김덕홍(金德弘)과 함께 고경명의 의병 부대에 참여하지만, 모친상으로 상청을 지키라는 형의 권유로 고향으로 돌아왔다. 김덕령은 전라도관찰사 이정암,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 등의 권유로 모친상임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김덕령은 선조(宣祖)로부터 형조좌랑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으며, 세자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김덕령은 5,0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쟁에 나서지만, 강화협상이 길어지면서 전공을 세울 수 없었다. 김덕령은 전공을 세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울화가 생겨 많은 술을 마시고 군법을 엄하게 하였다. 그로 인해서 군졸 간에 불평의 소리가 높았다. 이몽학이 충청도 홍산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도원수 권율의 명을 받아 진주에서 운봉까지 진군하였다가,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돌아가려 했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김덕령은 관료들로부터 이몽학과 내통하였다는 모함을 받았고, 20일 동안 옥에 갇혀서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을 받고 1596년 29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김덕령은 1661년 신원(伸冤)되어 관작이 복구되었고, 1668년 병조참의, 1681년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 1878년 광주의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는데 이듬해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1974년 광주의 충장사(忠壯祠)가 복원되었다.

[김덕령의 기록과 문헌자료]

김덕령은 문헌 자료에도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 문헌 자료는 크게 역사 자료와 문학 자료로 분류할 수 있다. 김덕령에 관한 역사 자료는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김덕령유사(金德齡遺事)』,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조야집요(朝野輯要)』 등이 있다. 『조선왕조실록』, 『김덕령유사』는 김덕령 기록과 관련한 대표적인 역사 자료이며, 『해동명신록』, 『호남절의록』은 국가와 지역에서 김덕령의 위상을 살필 수 있는 역사 자료이다. 『연려실기술』, 『조야집요』는 야사적 성격이 강해서 소설이나 전설과 연관이 깊다.

김덕령의 야사와 관련된 책들은 『풍암집화(楓巖輯話)』, 『동야휘집(東野彙集)』, 『대동기문(大東奇聞)』 등이 있다. 이 자료들은 조선 후기에 크게 유행했던 일종의 야사집인데, 세간에 떠돌던 김덕령의 기이한 행적이나 초인적 행동을 소개하고 있다. 『김덕령전』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 크게 유행한 군담소설류로서 『임진록』, 『임경업전』, 『전우치전』 등에 소재를 제공하였다. 대표적인 군담소설인 『임진록』은 김덕령이 중요한 등장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김덕령 전설의 전승 양상]

임진왜란은 조선의 정치와 사회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사건이며,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크게 변화시켰다. 또한, 기층민의 담론 활동인 설화의 내용과 형식에도 영향을 주었다. 민간에서는 사명당, 서산대사, 곽재우, 이항복, 유성룡, 신립 등 실존인물을 대상으로 인물전설을 구성·전승하였다. 인물전설은 기층민들의 시대 인식을 담아내는 대표적인 이야기 장르이다. 김덕령의 인물전설은 다른 인물보다 강한 전승력을 보이며 전국적으로 약 120편이 전해지고 있다.

김덕령의 인물전설은 고향인 광주에서 형식과 내용면에서 다양한 구성을 보이며 전승되고 있으며, 새로운 각편이 생산되고 있다. 반면 김덕령 인물전설은 호남 지역을 벗어나면 몇 개의 유형으로 집약되어 전승되는 양상을 보인다. 특히 김덕령의 죽음을 이야기하는 〈만고충신 김덕령〉 유형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구성·전승되고 있다. 호남 지역에서는 다양한 유형의 김덕령 인물전설이 전승되고 있으며, 〈명당뺏기〉 유형과 〈오누이 힘내기〉 유형은 다양한 변개를 보이면서 김덕령의 신화성과 비극성을 강조한다.

[김덕령 전설의 유형과 내용]

김덕령의 출생담

김덕령 출생담은 「명당뺏기」 유형을 중심으로 전승된다. 「명당뺏기」 유형은 김덕령무등산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이야기이며, 비극적 죽음을 상징적으로 예고한다. 김덕령의 선대(先代)는 중국의 풍수가가 지정한 명당 자리를 썩은 계란을 이용해서 차지한다. 그리고 김덕령 조상을 명당에 안장해서 훗날 황후장상과 같은 위인의 후손이 태어날 것으로 기대한다. 김덕령은 묘혈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인물이다. 더불어 호랑이가 갑자기 김덕령 어머니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는 태몽담도 전한다.

김덕령의 비범담

비범담은 김덕령이 비범한 인물로 성장할 것임을 미리 보여 주는 이야기이다. 비범담은 인물의 힘과 재주, 용력 등이 뛰어나며, 때로는 도술을 부릴 줄도 아는 인물로 형상화한다. 김덕령이 유년 시절 담양 환벽당 처마 끝에 올라가 참새를 잡은 이야기, 서봉사에서 공부를 할 때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은 이야기, 무등산 널바위를 건너뛰었다는 이야기, 쏜 화살보다 먼저 말을 달렸다는 말바위 이야기, 누이와 힘겨루기에서 졌다는 오누이 힘겨루기 이야기, 바위를 내리쳐 깨뜨렸다는 깨진바위 이야기 등이 전승되고 있다. 비범담은 김덕령이 장차 비범한 인물로 성장해서 나라의 큰 인물이 될 것임을 예시하는 기능을 한다.

김덕령의 활약담

김덕령임진왜란 당시에 5,000여 명의 의병을 이끈 대장군이었다. 조선 조정은 김덕령이 의병을 일으킨 이후 다른 지역의 의병 조직을 김덕령에게 귀속시켰다. 이러한 김덕령의 위상을 반영하듯, 김덕령의 활약담은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다. 무등산에는 주검동(鑄劍洞)이라는 지명과 유적지가 남아 있다. 주검동김덕령임진왜란을 대비하기 위해서 무기를 제조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곳이다. 김덕령은 조정으로부터 충용장(忠勇將)과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이러한 군호와 어울리게 전장에서 활약한 이야기가 전승되는데, 날아다니는 호랑이처럼 도술을 부려 적군을 무찌르고 또 적군들 역시 김덕령의 이름만 들어도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김덕령은 군령을 엄하게 해서 아군은 물론 왜병까지 ‘김덕령’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김덕령의 사망담

김덕령은 이몽학과 연루되었다는 무고로 비극적 죽음을 맞이하였다. 기층민들은 김덕령이 이순신과 마찬가지로 억울하게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김덕령의 죽음 뒤에는 또 다른 진실이 있다고 믿는다. 김덕령 사망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정의 관료들이 김덕령을 잡으려 해도 잡지 못했고, 겨우 잡았지만 어떤 무기로도 김덕령을 죽일 수 없었다. 김덕령은 만약 “만고충신 김덕령”의 글이 적힌 비석(현판)을 세워주면 죽이는 방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한다. 조정의 관료들이 “만고충신 김덕령” 비석을 세우자, 김덕령은 자신의 겨드랑이 밑의 용비늘을 벗기고 찔러 죽이라 한다. 조정의 관료들은 김덕령이 죽은 뒤에 비석에 새겨진 글자를 지우려 하지만 글자는 더욱 선명해졌다. 기층의 사람들은 김덕령이 역적으로 몰려 죽었지만, “만고충신 김덕령”이라는 비석을 통해서 김덕령이 역적이 아님을 이야기로 전하고 있다. 김덕령의 사망담은 아기장수 설화를 모티프로 하고 있으며, 김덕령이 언젠가는 민중영웅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층민의 기대를 담고 있다.

김덕령의 기타 전설

김덕령의 출생지인 광주에서는 다른 지역에서 발견되지 않은 김덕령 관련 이야기가 전승되고 있어서 주목을 끈다. 우선 김덕령의 어머니와 관련된 이야기이다. 「김덕령의 어머니」는 호식을 당할 운명에 처한 김덕령의 어머니가 김덕령을 임신했기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김덕령의 어머니」김덕령의 신이성을 김덕령의 어머니와 연결해서 강조하고 있다. 또한, 김덕령의 누이에 관한 이야기가 〈오누이 힘내기〉 유형과 별도로 전승되고 있다. 「소 한 마리 먹고 낳은 김덕령 누나」에서는 김덕령이 씨름판을 돌아다니면서 힘자랑을 하고 다닐 때, 누나가 변장을 해서 김덕령을 이기게 된다. 김덕령이 진 것이 분해서 원통해 하고 있을 때, 김덕령 부모는 상대가 누이임을 알려 준다. 그리고 부모는 김덕령의 누이를 임신할 때 소 한 마리 잡아먹은 내력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김덕령 누나가 세운 바위들」광주광역시 북구 용강동 입암마을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인데, 김덕령의 누이가 자신의 치마에 바위를 가지고 다니면서 광주 곳곳에 바위를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광주의 지명전설이 김덕령과 연결되어 이야기로 전승되고 있다.

[김덕령 전설의 의의]

김덕령 전설은 다양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특히 김덕령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 사건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임진왜란은 조선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던 사건이다. 임진왜란은 조선 사회의 지배 집단에게 위기의 시작이었고, 기층민에게는 변화를 모색할 수 있는 기회였다. 양반들은 전쟁의 경험을 문자로 기록했고, 기층민은 기억과 구술로 이야기를 전승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덕령은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김덕령은 지배 집단에게 유교적 관념을 수렴하는 존재로 의미화되었고, 반대로 기층민에게는 지배 체제에 저항하는 민중적 영웅으로 형상화되었다.

기층민의 역사라 할 수 있는 김덕령 전설은 지배 집단에 저항하는 인물로서 인식되면서 다양한 이야기로 확장되었다. 김덕령의 고향 광주에서 전승되는 김덕령 전설은 김덕령의 출생담, 비범담, 활약담, 사망담 등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가 구성·전승되고 있으며, 김덕령 누이에 대한 이야기도 함께 전승되고 있는 특징을 보인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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