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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735
한자 鄭世雲
영어공식명칭 Jeong Sewoon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문다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활동 시기/일시 1359년 - 정세운 기철을 주살하고 1등 공신에 책록
활동 시기/일시 1360년 1월 - 정세운 서북면도순찰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61년 - 정세운 서북면군용체찰사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361년 - 정세운 공민왕을 호종하여 복주로 남행
활동 시기/일시 1362년 - 정세운 최영·이방실 등과 함께 홍건적 격퇴
몰년 시기/일시 1362년연표보기 - 정세운 김용 등에게 살해되어 사망
성격 무관
성별
본관 광주
대표 관직 대호군|서북면군용체찰사|첨의정승

[정의]

고려 후기 광주 지역 출신으로 도형벽상공신 1등에 책록된 공신, 무관.

[가계]

정세운(鄭世雲)[?~1362]의 본관은 광주(光州), 출신지는 장택현(長澤縣)[현재의 전라남도 장흥]이다.

[활동 사항]

정세운은 공민왕이 세자 때 함께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하고, 벼슬을 거듭하여 대호군(大護軍)이 되었다. 정세운은 공민왕이 즉위하자 왕을 호종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어 김용(金鏞)과 더불어 총애를 받았다.

1354년(공민왕 3) 원나라가 고우(高郵)에 진을 치고 있던 장사성(張士誠)을 토벌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어 정세운을 비롯한 여러 장수와 서경의 수군 300명과 날쌔고 용감한 병사들을 징발하여 8월 10일을 기한으로 연경(燕京)에 모여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정세운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지원하였다. 이후 정세운은 군부판서(軍簿判書)와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를 역임하였다.

1359년(공민왕 8) 정세운은 기철(奇轍)을 주살해 사직을 지킨 공으로 남양후(南陽侯) 홍언박(洪彦博), 참정상의(參政商議) 경천흥(慶千興)과 함께 1등 공신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홍건적이 공격해 들어오자 다음 해 정월에 서북면도순찰사에 임명되어 이에 대비하였다.

1361년 홍건적이 군사 10여만 명을 이끌고 다시 공격해 오자, 정세운은 서북면군용체찰사(西北面軍容體察使)에 임명되어 절령(岊嶺)의 성책을 지켰다. 그러나 성책이 무너지자 곧 왕을 호종해 복주(福州)[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남행하였다.

정세운은 성품이 충성스럽고 청백하여, 밤낮으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적을 소탕할 것을 스스로 맹세하였다. 왕에게 빨리 조서를 내려 민심을 위로하고 제도(諸道)의 군사를 징발해 적을 칠 것을 주청(奏請)하였다. 이에 왕은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임명해 절월(節鉞)을 주어 모든 군사를 총괄하게 하였다.

이때 홍건적은 개경을 함락시키고 이곳을 본거지로 삼아 각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정세운은 1362년 정월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황상(黃裳)·한방신(韓方信)·이여경(李餘慶)·김득배(金得培)·안우경(安遇慶)·이구수(李龜壽)·최영(崔瑩) 등 여러 장수와 함께 군사 20여만 명을 거느리고 나갔다. 개경(開京)을 포위하고 공격을 가해 적들을 압록강 밖으로 몰아내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정세운의 공을 시기한 김용이 왕의 뜻을 거짓으로 꾸미고, 안우·이방실·김득배를 비밀리에 꾀어 정세운을 살해하였다.

[상훈과 추모]

공민왕은 정세운을 살해한 죄를 논핵(論劾)하였고,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추증해 장사를 지냈다. 홍건적 침입 당시 복주로 피난하는 왕을 호종하고 개경을 수복한 공을 추록하여 도형벽상공신(圖形壁上功臣) 1등 공신으로 책록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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