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817
한자 朴光玉
영어공식명칭 Park Kwangok
이칭/별칭 경원(景瑗),회재(懷齋)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광주광역시 서구 매월동
시대 조선/조선
집필자 홍창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26년연표보기 - 박광옥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46년 - 박광옥 생원 및 진사 입격
활동 시기/일시 1555년 - 박광옥 향약 설립
활동 시기/일시 1565년 - 박광옥 어머니 윤씨의 상을 치름.
활동 시기/일시 1569년 - 박광옥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74년 - 박광옥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74년 - 박광옥 운봉현감(雲峯縣監)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75년 - 박광옥 통선랑(通善郞)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77년 - 박광옥 운봉에 황산대첩비(荒山大捷碑) 건립
활동 시기/일시 1578년 - 박광옥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 등 역임
활동 시기/일시 1579년 - 박광옥 예조정랑(禮曹正郞)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80년 - 박광옥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등 역임
활동 시기/일시 1580년 - 박광옥 성절사서장관(聖節使書狀官)에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옴
활동 시기/일시 1582년 - 박광옥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 임명
활동 시기/일시 1585년 - 박광옥 밀양부사(密陽府使) 임명
몰년 시기/일시 1593년연표보기 - 박광옥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78년 - 박광옥 벽진서원 배향
추모 시기/일시 1681년 - 박광옥 도승지(都承旨) 추증
출생지 회산마을 - 광주광역시 서구 매월동 지도보기
묘소|단소 음성박씨 선산 - 광주광역시 서구 송풍로 42[벽진서원]지도보기
사당|배향지 벽진서원(碧津書院) - 광주광역시 서구 송풍로 42[풍암동 769-1]지도보기
성격 문관|의병장
성별
본관 음성(陰城)
대표 관직 운봉현감|예조정랑|밀양부사

[정의]

조선 전기에 운봉현감, 예조정랑, 밀양부사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활약한 광주 지역 출신의 문신이자 의병장.

[가계]

박광옥(朴光玉)[1526~1593]의 본관은 음성(陰城)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선교랑(宣敎郎),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 등을 역임한 박형지(朴亨之), 할아버지는 참봉 박자회(朴子回), 아버지는 성균관사예 박곤(朴鯤)이고, 어머니는 찰방 윤인손(尹仁孫)의 딸 파평윤씨(坡平尹氏)이다. 부인은 서욱(徐勗)의 딸 이천서씨(利川徐氏)이다.

[활동 사항]

박광옥은 1526년(중종 21) 광주 선도면 개산리[지금의 광주광역시 서구 매월동 회산마을]에서 태어났으며, 1546년(명종 1) 생원과 진사에 동시에 입격하였다. 박광옥은 1569년(선조 2)에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임명됨으로써 처음 벼슬길에 올랐으며, 나이 49세가 되는 1574년(선조 7) 별시에서 을과 2위로 과거에 급제하였고, 운봉현감(雲峯縣監)을 제수받아 전라도 남원 운봉에 부임하였다. 운봉현감으로 있던 1577년(선조 10)에는 태조 이성계의 황산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지역의 유림(儒林)과 함께 황산대첩비를 세웠으며, 재주 있는 자들을 선발하여 학습의 기회를 주는 등 목민관의 소임을 다하였다.

박광옥은 1578년 전라도도사(全羅道都事) 및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 1579년 예조정랑(禮曹正郞), 1580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및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 1582년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 1585년 밀양부사(密陽府使) 등을 역임하며 안팎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580년(선조 13)에는 성절사서장관(聖節使書狀官)에 임명되어 명나라 베이징[北京]에 다녀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박광옥은 김천일(金千鎰), 고경명(高敬命) 등과 의병을 일으킬 것을 의논하고, 병사와 군량, 군기 등을 모으는 데 힘을 보탰다. 다만, 박광옥은 이때 평소에 앓던 병이 깊어져 원정을 나가지는 못하였고, 대신 광주 지역에 남아 고향을 지킬 것을 맹세하였다. 박광옥은 당시 광주목사였던 권율(權慄)을 도와 지역에 격문을 보내 장병을 모집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박광옥을 나주목사로 임명하였으나, 병이 심해져 1593년(선조 26)에 사망하였다.

[학문과 저술]

박광옥은 유헌(遊軒) 정황(丁熿)에게서 수학하였으며, 고경명(高敬命), 이만인(李萬仁), 송응실(松應實) 등과 교유하였다. 『회재유집(懷齋遺集)』박광옥의 시문집이다. 전체 2권과 상·하 부록으로 구성되었는데, 1799년(정조 23) 박광옥의 7대손 박승언(朴承彦)과 8대손 박성일(朴性一)이 초간하였고, 1983년 복간하였다. 임진왜란 당시의 양상을 비롯하여, 박광옥의 교우 관계 및 당시의 문학사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묘소]

박광옥 묘소는 광주광역시 서구 풍암동 벽진서원 인근의 음성박씨 문중의 선산에 있으며, 그 근처에 묘비가 세워져 있다.

[상훈과 추모]

광주광역시 서구 풍암동에 있는 벽진서원은 1602년(선조 35) 벽진사우로 출발하였으며, 1604년(선조 37) 벽진서원으로 이름을 고쳤다. 1681년(숙종 7) 숙종이 박광옥에게 도승지를 증직하고 김덕령을 추가로 배향하면서 ‘의열(義烈)’이라는 사액을 하사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2018년 복설되었다. 벽진서원은 2021년 1월 28일 광주광역시 서구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벽진서원 내에는 박광옥의 문집인 『회재유집』 간행을 위해 판각한 목판인 ‘회재유집목판(懷齋遺集木板)’이 보관되어 있다. 이 목판은 1996년 3월 19일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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